8월 24일 국내 언론들은 체코 출신의 한 여성이 남섬 산악지대의 외딴 산장에 머물다가 한 달 만에 극적으로 구조됐다는 기사를 일제히 실었다.
이 여성은 파트너와 함께 루트번(Routeburn) 트랙 겨울등반에 나섰다가 파트너가 사고로 숨지자 혼자 산장에서 도움의 손길을 기다리던 중 구조됐는데, 보기 드문 이번 뉴스는 당시 한국과 영국을 비롯한 해외 언론에도 널리 소개됐다.
<루트번 트랙은 어떤 곳?>
서던 알프스에 자리 잡은 루트번 트랙은 트래킹 천국이라고 할 수 있는 뉴질랜드에서도 손꼽히는 트랙 중 하나로, 이웃한 밀포드(Milford) 트랙만큼이나 국제적으로도 널리 알려진 곳이며 주변을 돌아보면 교민들 중에서도 이곳을 다녀온 분들이 꽤 있다.
첨부된 지도를 보면 알 수 있듯 이 트래킹은 보통 밀포드 사운드로 향하는 국도 94호선이 호머(Homer)터널로 들어서기 전 거치는 ‘더 디바이드(The Divide)’라는 곳에서 시작, 통상 2일 내지 3일 정도를 산장에 머물며 등반한 후 루트번 셸터를 거쳐 퀸스타운 북쪽 65km 지점의 와카티푸(Wakatipu) 호숫가 마을인 글레노키(Glenorchy)로 빠져 나오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피오르드랜드(Fiordland)와 마운트 아스파이어링(Mount Aspiring) 등 2개의 국립공원을 거치는 이 트랙은 유네스코에 ‘세계자연유산(World Heritage)’으로 등재된 ‘테 와히포우나무(Te Wahipounamu)’의 일부이며, 특히 산과 호수, 폭포 등 자연경관도 수려하지만 앵무새인 키아(Kea)는 물론 로빈(Robin), 팬테일(Fantail), 벨버드(Bellbird) 등 토종 조류가 많이 서식하는 지역이다.
트랙 길이는 32km이며 표고차는 900m 정도이고 가장 높은 곳은 해리스 안부(Harris saddle)로 1천 255m인데, 도중에 산장 4곳과 2개 캠프장이 위치하며 여름에는 몇 달 전 예약해야만 시설을 이용할 수 있을 정도로 크게 붐빈다.
이보다 서쪽에 자리잡은 밀포드 트랙이 겨울에 공식적으로 폐쇄되는 반면 루트번 트랙은 겨울에도 개방되는데, 그러나 폭설 등으로 눈사태 염려가 커지거나 하면 출입이 통제되며 자연보호부(DOC) 측에서는 겨울에는 등반 경험이 많고 관련 장비가 충실히 갖춰진 등반객만 출입할 것을 권고하고 있다.
실제로 동계에는 이 같은 위험으로 인해 등반에 나서는 인원이 적으며 등반을 시도했다가도 기상 및 코스 상태에 따라 자연보존부가 주의보를 내리면 등반을 포기하는 경우도 많다.
또한 완주보다는 코스 초입 등 위험이 덜한 구간만을 선택하는 경우가 많으며 이 경우에도 충분한 그룹을 만든 후 산행에 나서는데, 특히 루트번 트랙은 단선 트랙이므로 일단 하룻밤 이상 트랙에서 지냈다면 출발점으로 회귀하거나 도착점으로 계속 나아가는 것 외에 도중에 빠져 나오기가 힘들다.
<극적으로 산장 발견해 목숨 건져>
이번에 사고를 당한 체코 커플(남 27세, 여 30대)은 지난 7월 26일(화)에 그레노키 쪽을 통해 트랙에 들어섰다.
이들이 트랙에 들어선 하루 뒤 사고를 당한 곳은 맥켄지 호수 부근으로 당시 남자가 가파른 절벽에서 7 m 가량 추락한 후 이내 또 다시 더 깊은 곳으로 추락하면서 큰 부상을 입은 상태에서 절벽과 나뭇가지에 걸렸던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여성 파트너는 부상당한 남성이 걸려 있던 곳까지 간신히 다가가는 데는 성공했지만 여러 차례의 시도에도 불구하고 그를 끌어내릴 수 없는 상황이었으며 결국 남성은 얼마 뒤 숨지고 말았다.
이 과정에서 탈진한 여성은 벼랑 옆에서 텐트도 없이 침낭 안에 지니고 있던 물건들을 쑤셔 넣고 이틀 밤을 버텼지만 추위와 부상 등으로 더 이상 어찌할 방도가 없자 머물 곳을 찾아 나섰다.
그러나 몇 번의 시도가 눈과 안개 속에서 실패로 돌아간 후에서야 결국 탈출 시도 이틀 만에 2km 가량 떨어진 ‘맥켄지 호수 산장(Lake McKenzie Hut)’까지 도달하는 데 성공했다.
그녀는 산장에 딸린 몇 채의 건물 중 시즌에 관리인들이 거주하는 숙소(warden’s hut)의 유리창을 부수고 안으로 들어갔는데, 숙소에는 매트리스가 깔린 침상은 물론 원목난로와 함께 가스, 그리고 깡통에 담긴 음식들도 어느 정도 보관돼 있어 일시적으로 머무르는 데는 큰 문제가 없는 상태였다.
도착 후 그녀는 난로의 재를 이용해 ‘도움(help)’을 뜻하는 ‘H’ 글자를 눈 위에 새겨 놓은 후 지나가는 사람들이 이를 봐주기를 바랬으나 사건 이후 지나간 사람은 없었다.
또한 당시 숙소에는 무전기도 있었지만 영문 안내문 때문에 사용하지 못해 조기에 구조될 수 있는 기회를 놓치기도 했는데, 특히 파트너를 잃었다는 정신적 충격이 그녀의 정상적인 판단과 행동에 많은 지장을 주었던 것으로 전해졌다.
<무리한 등반이 부른 참사>
이들이 등반에 나서기 이틀 전 기상 당국은 이 지역에 9일간의 강설주의보를 발령했으며 주의보는 이후 4일간 더 연장됐는데, 이에 따라 자연보존부는 26일 당시에도 눈사태 위험으로 트랙 출입을 하지 말도록 권고했던 상황이었다.
실제로 트랙에는 이미 그 이전 몇 주간에 걸쳐 내린 폭설로 최대 1m까지 눈이 쌓인 상태였는데, 여성이 구조되기 한 주 전에 등반에 나섰던 오타고의 한 등반대는 자연보존부 권고에 따라 일부 코스만 등반하고 돌아가기도 했다.
당시 등반에 참여했던 한 산악인은, 당시 여성이 머물던 곳까지는 아무도 갈 수 없는 상태였으며, 이 커플의 실수는 글레노키에서 정상부 해리스 안부를 넘어간 것으로 이 바람에 트랙 표시가 눈에 묻혀 길을 벗어나게 됐을 거라고 지적했다.
한편 이곳에서 가장 가까운 밀포드 비행장에 설치된 기상관측 장비에 따르면, 지난 30일간 측정된 기온은 영하 3℃~15℃였지만 더 높은 지역이었던 조난지역은 이보다 기온이 더 내려갔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들은 당시 일반 등반장비는 갖추고 있었지만 텐트는 물론 조난신호기(locator beacon)도 없었으며 특히 이들의 등반일정을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는데, 이들은 트랙에 들어선 뒤 첫날 밤을 차가운 야외에서 지낸 후 이튿날부터 짙은 안개와 폭설, 강한 바람 속에서 길을 잃고 헤매기 시작했다.
또한 여성이 산장에 도착했을 당시 손가락들은 하얀색으로 변했고 발은 크게 부풀어 올랐는데 다행히 며칠 만에 다시 등산화를 신을 수 있게 되자 그녀는 나뭇가지로 ‘설피(snow shoes)’를 만드는 등 탈출을 여러 차례 시도했지만 쌓인 눈과 정신적, 체력적인 문제로 결국 실패했다.
이들은 어느 정도 등반 경험이 있는 것으로 알려졌지만 이번 사고는 부실한 장비와 현지 정보에 어두웠던 이들이 경고에도 불구하고 무리한 산행에 나섰던 것이 화근이었며, 여기에 등반일정을 주위에 알리지 않은 점도 사태를 더 악화시키는 데 기여했다고 할 수 있다.
<모국에서 날아온 구호의 손길>
그녀가 외딴 산장에 혼자 갇혀 있다는 사실을 아무도 모른 채 한 달여의 시간이 흐르는 상황에서 구원의 손길은 뜻밖의 곳에서 날아왔다.
이들 커플로부터 오랫동안 소식이 끊기자 염려가 된 본국의 가족과 친구들이 이 사실을 소셜미디어를 통해 주변에 알렸고, 이를 본 체코 명예영사가 이들의 사진과 함께 차량등록번호를 경찰에 통보하면서 도움을 요청했다.
곧바로 수색에 나섰던 현지 경찰은 글레노키 쪽 트랙 입구 주차장에서 이들의 차량이 오랫동안 방치된 상태를 확인했으며, 눈사태 구역을 중심으로 수색을 진행하던 중 8월 24일에 맥켄지 산장에서 여성을 발견하고 사건의 전말을 확인할 수 있었다.
여성은 즉시 헬리콥터로 퀸스타운 병원으로 옮겨져 건강검진을 받았는데, 파트너를 잃은 충격 외에는 건강에 큰 이상이 없는 것으로 전해졌으며 이후 글레노키에 머물면서 명예영사의 통역으로 경찰 조사를 받았다.
또한 남성의 시신은 기상 상태가 악화돼 이틀 뒤 도보수색팀에 의해 수습됐으며 8월 26일 퀸스타운에서 부검이 실시됐다.
당시 가급적 빠른 시간 내에 귀국을 희망했던 여성은 같은 날 열린 기자회견에서 구조대에 감사를 표시하고 자연보존부와 구조대에 기부금 기탁 의사를 밝혔는데, 당시 보도에 따르면 이 커플은 금년 2월 29일 워킹홀리데이 비자를 가지고 입국했던 것으로 전해졌다.
한편 자연보존부 관계자는, 겨울철 루트번 트랙은 등반 경험이 풍부한 사람들만, 그것도 기상 등 제반 조건이 충분히 허용될 때 등반에 나서야 한다면서, 이번 사건처럼 한 달여 동안 이곳을 지나간 이들이 없었다는 사실 역시 별로 놀랄만한 일이 아니라고 전했다.
그는 그나마 이 여성이 식량과 연료 등이 보관된 산장에 피신해 있었기에 정말 다행스럽게 구조될 수 있었다면서, 무리한 행동을 하지 않고 구조를 기다린 것이 좋은 결정이었다고 지적했다.
경찰 관계자는 남성의 사망에 형사적인 혐의는 없다면서, 그러나 한 달이나 지난 후 실종신고가 이뤄졌다는 점이 대단히 이례적이라고 지적하고 정확한 경위를 조사하겠다는 입장을 밝히기도 했다.
남섬지국장 서 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