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저울과 검을 들고 눈을 감고 있는 정의의 여신 ‘디케(Dike)’
지난 11월 오클랜드 법원에서 열린 두 건의 살인사건과 관련된 형사재판에서 두 명의 피고인들에게 잇달아 ‘무죄(not guilty)’가 선고돼 언론과 시민들의 큰 관심 속에 논란도 함께 일어났다.
살인이라는 중대한 범죄행위에도 불구하고 무죄가 되는 일이 실제로 벌어진 이번 사건들을 지켜보자면, 일반인들이 가진 사회적 법 감정과 실제 법률의 집행 사이에는 엄연히 온도 차이가 있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실감하게 된다.
(사건 1: 정신병으로 유죄 면해)
<주택가에서 조깅 중 살해당한 여성>
11월 15일(화) 오클랜드 고등법원에서 열린 리뮤에라(Remuera) 살인사건의 범인인 테비타 마피 필로(Tevita Mafi Filo, 25)에 대한 재판에서 담당 판사는, 피고에게 ‘정신병을 이유로 살인 혐의에 대해 무죄(not guilty of murder by reason of insanity)’ 판결을 내렸다.
마운트 로스킬(Mt. Roskill) 출신인 필로는 금년 1월 7일(목) 아침 10시 20분경에 오클랜드 고급 주택가인 리뮤에라에서 조깅을 하던 조안 마리 퍼트(Joanne Marie Pert, 사망 당시 41세)를 칼로 찔러 살해한 혐의로 재판을 받아왔다.
당시 숨진 퍼트는 범인으로부터 공격을 받은 후 도움을 요청하려고 쇼어(Shore) 로드에 있는 한 주택의 현관 앞 잔디밭까지 다가가 쓰러졌지만 곧바로 발견되지는 못했다.
나중에야 창문으로 사람이 쓰러진 광경을 목격한 집주인의 신고로 오전 11시경에 현장에 구급차가 도착했지만 그녀는 결국 현장에서 숨졌는데, 범인은 범행 당일 정오경 범행에 쓰인 흉기를 소지하고 오클랜드 중앙경찰서에 자진 출두했다.
이튿날 오클랜드 법원에 출두한 그에게 판사는 ‘정신감정(psychiatric evaluation)’을 포함한 몇 가지 보고서를 제출하도록 명령했고 변호인은 보석을 신청하지 않았는데, 당시 범인은 심리가 끝날 무렵 웃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숨진 여성은 팡가누이(Whanganui) 출신으로 7살과 6살의 아들과 딸을 둔 회계사였는데, 부친인 케빈(Kevin) 퍼트에 따르면 그녀는 평소 달리기와 수영을 좋아해 오클랜드 하프마라톤에도 출전했으며 당일도 집이 있는 오클랜드 시내의 한 아파트에서 6km 가량 떨어진 현장까지 이어지는 정례적인 조깅을 하던 중이었다.
그녀는 또한 동양의학에도 관심이 많아 ‘NZ School of Acupuncture and Traditional Chinese Medicine’에서 공부했고 ‘Health Science masters degree in Traditional Chinese Medicine’의 학위도 지닌 것으로 알려졌다.
<사회적으로 방치됐던 정신질환자의 범행>
이번 사건에서 문제가 된 것은 정상적 사고가 불가능해 병원에 있어야 할 정신질환자가 제대로 된 보호나 관리도 없이 방치되던 중 전혀 무고한 사람의 목숨까지 빼앗았다는 사실이다.
경찰 보고에 따르면 필로는 범행 하루 전날의 밤 11시 30분경에도 세인트 헬리어스(St Heliers) 인근의 한 간이식당에서 차를 몰고 귀갓길에 오른 한 커플을 노란색 마즈다(Mazda) 승용차를 타고 뒤를 따라가기도 했었다.
▲ 리뮤에라 사건 현장을 조사 중인 경찰
수상한 차가 미행 중이라는 사실을 눈치챈 이 커플은 인근 쇼핑센터를 통과하고 유턴을 비롯해 여러 차례 급커브를 도는 등 그를 따돌리기 위해 노력했지만 끝내 실패하자 경찰에 신고했다.
결국 신고를 받은 경찰관들이 필로의 차를 정지시킨 후 검문을 통해 그의 차에서 칼을 발견했지만, 자신이 당시 길을 잃었고 또한 자신을 지키기 위해 무기를 지니고 다닌다는 말을 듣고는 흉기만 압수한 채 놓아주었다.
재판 기록에 따르면 당시 경찰관들은 몇 가지 질문과 함께 경찰 컴퓨터를 통해 필로의 이름을 조회했지만, 그가 대중에게 위험을 초래하거나 정신질환이 있다는 사실 등은 파악할 수 없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필로는 살인 범행 직후 출두한 경찰서에서의 진술을 통해, 전날 마주쳤던 커플을 살해할 계획이었다고 고백, 만약 해당 커플이 당시 상황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었다면 또 다른 살인사건이 발생할 뻔했다.
이 사실이 전해지자 범죄 희생자 보호단체의 한 관계자는, 흉기를 소지하다 경찰에 적발된 이들은 일단 모두 체포하는 등 경찰의 사전 예방활동이 강화되어야 한다면서, 당시 사건은 범인이 흉기소지뿐만 아니라 10여 km가 넘는 스토킹까지 자행했던 상황이었다면서 경찰이 더 엄중하게 대처했어야 했다고 주장했다.
필로는 이외에도 살인사건을 저질렀던 무렵에 주로 성적 동기에서 비롯된 다양한 폭력행위를 저지른 것으로 밝혀졌는데, 그러나 그의 모든 행위는 정상적 사고가 불가능한 상태였다는 판단 하에 처벌이 불가능한 처지가 됐다.
이번 재판에서는 또한, 필로가 10대 때부터 말기 신장병으로 투석을 받아오던 환자였을 뿐만 아니라 이전부터 ‘정신분열증(schizophrenic)’ 환자이기도 했다는 사실이 함께 밝혀지기도 했다.
당시 사건은 국내 언론뿐만 아니라 영국의 데일리 메일(Daily Mail) 등 외국 언론을 통해서도 크게 보도됐으며 국내에서는 한동안 여성들이 혼자 조깅에 나서기를 꺼리는 등 사회적으로 큰 파문을 일으켰다.
(사건 2: 살인으로까지 번진 이웃의 소음)
<정당방위로 귀결된 살인사건>
한편 리뮤에라 사건 판결 한 주 전인 11일(금)에는 같은 오클랜드 고등법원에서, 칼로 한 명을 살해하고 다른 이에게는 부상을 입혔던 더스틴 라 몬트(Dustin La Mont, 26) 피고에게 배심원들이 전원일치로 무죄평결을 내린 재판이 열렸다.
카페 직원으로 마운트 앨버트(Mount Albert)의 렌턴(Renton Road) 로드 임대주택에 거주하던 라몬트는, 작년 12월 2일 자정 무렵에 집 주변에서 네이선 푸케로아(Nathan Pukeroa, 24)의 목을 칼로 찔러 사망시켰고 그의 친구인 데바레이 주니어 코울-쿠바지(Devaray Junior Cole-Kuvarji, 23)에게는 중상을 입혔다.
2주 동안 이어진 당시 재판에서 배심원들은 5시간에 걸친 심리 끝에 라몬트에게 ‘정당방위(self-defence)’를 인정해 무죄평결을 내렸는데, 판사가 피고에게 ‘너는 이제 자유이니 가족들에게 가라’고 말하자 그와 가족들은 눈물을 흘렸다.
반면 죽은 푸케로아의 유족들은 라몬트에게 욕설과 함께 ‘살인자’라고 외쳐댔고, 부상을 당했던 코울-쿠바지 역시 피고석 유리벽을 쳐대면서 인종차별적 판결이라고 재판 결과에 큰 불만을 표시했다.
사건 당시 팡가레이(Whangarei) 출신인 푸케로아는 사건 3일 전에 오클랜드에 도착해 라몬트의 옆집에 머물던 중이었으며 코울-쿠바지는 푸케로아를 만나려고 그 집을 찾아왔던 중이었다.
<잦은 파티 등 이웃간 분쟁이 살인까지 초래>
라몬트는 사건 발생 21개월 전부터 이웃집의 밤낮없는 차대기와 마약 연관 행위, 그리고 거듭되는 파티로 인한 소음 등으로 고통을 받아왔으며, 이런 상황을 자기가 사는 집의 주인은 물론 이웃집 주인을 비롯해 시청과 경찰, 동물보호기관 등에 여러 차례 알렸으나 문제가 해결되지 않던 상황이었다.
이들 이웃은 갱단인 ‘블랙 파워(Black Power)’ 멤버였으며 라몬트는 이들의 행위를 영상으로 남기기도 했는데, 당일 밤에도 소음이 이어지자 칼을 품고 상황을 알아보러 거리로 나섰던 그는 마침 소변을 보려고 밖으로 나왔던 두 명을 집 앞에서 마주치게 됐다.
당시 이들 둘은 자기집 진입로를 살피던 라몬트에게 다가가, 경찰을 위해 일하냐고 물은 뒤 옷을 잡아 끌고 주먹을 휘두르면서 부셔버리겠다는 등 위협적인 행동과 함께 실제로 그를 어두운 쪽으로 밀어 부쳤다.
결국 마르고 왜소한 체격의 라몬트는 자신보다 덩치가 훨씬 큰 그들에게 겁을 잔뜩 먹은 공황 상태에서 지녔던 칼을 휘두른 후 도망쳤는데, 법정에서 그는 당시 칼집을 열었고 도로 위로 도망치던 기억 밖에는 나지 않는다고 말했고 변호인은 계속 정당방위를 주장했다.
당시 재판 기간은 물론 배심원 판결 이후 댓글은 물론 온라인 토론 웹사이트를 중심으로 많은 사람들이 재판을 놓고 논쟁을 벌였는데, 그 중에는 라몬트에게 언젠가는 ‘인과응보’가 일어날 것이라는 협박성 글을 남긴 이도 있었으며 인종차별적 판결이라는 지적도 많이 이어졌다.
반면 일부 법률가들을 포함한 여러 사람들은 정황상 정당방위가 분명하다고 지적했는데, 특히 이들 중에서도 평소 소음으로 이웃간 분쟁을 겪어온 이들은 자신의 경험까지 인용하면서 적극적으로 라몬트를 옹호하고 나서기도 했다.
남섬지국장 서 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