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28일 재외국민 참정권을 인정한 한국 헌법재판소 결정이 나왔다. 헌재의 이번 결정은 한국 정치권뿐만 아니라 한국을 떠나 살고 있는 우리 교민들에게도 큰 파장을 일으키고 있다. 그 의의와 남은 과제 등에 대해 알아 본다.
憲裁, 在外국민 투표권 제한 헌법불합치 결정
한국 헌법재판소 전원재판부(주심 김종대 재판관)는 지난달 28일 일본 영주권자 최모씨, 외항 선원 주모씨 등 29명이 "재외국민의 참정권을 제한한 공직선거법과 국민투표법은 위헌"이라며 낸 헌법소원 사건에서 재판관 전원 일치로 헌법 불합치(不合致) 결정을 내렸다. 헌법불합치란 해당 법률 조항에 대해 위헌성을 인정하면서도 위헌 결정에 따른 법적 공백을 막기 위해 법 개정 때까지 일정 기간 해당 조항 효력을 유지하거나 한시적으로 중지시키는 결정이다. 재판부는 법 개정시한을 2008년 12월 31일까지로 정했다. 헌재는 "주민등록을 할 수 없는 재외국민 또는 국외 거주자가 투표권을 행사할 수 없도록 한 것은 기본권을 침해한다"고 밝혔다.
헌재는 결정문에서 "선거권 제한은 제한을 불가피하게 하는 개별적ㆍ구체적 사유가 명백하게 존재할 때만 정당화될 수 있으며 기술상 어려움 등을 이유로는 정당화될 수 없다"고 지적했다. 헌재는 그러나 "지금 단순위헌을 선언하면 17대 대통령 선거와 1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선거인명부 작성문제 등으로 법적 혼란이 일어날 가능성이 높아 법적ㆍ기술적 대책 마련에 시간을 주기 위해 헌법 불합치 결정을 내린다"고 밝혔다.
17대 대통령 선거는 올 12월에, 18대 국회의원 선거는 내년 4월에 실시될 예정이다. 현행 선거법에 따르면 9월 초에는 해외부재자 등록을 시작해야 한다. 이 때문에 정치권이 선거법 개정에 조속히 나서지 않으면 올해 대선은 물론, 자칫 하다가는 내년 총선에서도 재외국민의 참여가 어려울 것으로 예상된다.
憲裁, 내년 말까지 법 개정 주문
헌재 결정은 국적을 포기하지 않는 한 재외국민에게 완전한 선거권을 부여해야 하며 국민이면 누구나 향유해야 할 기본권을 국가가 보장해야 한다는 선언으로 받아들여진다. 재외국민에게 투표권을 줄 것이냐 말 것이냐 문제는 오랜 논란 거리였다. '재외국민 참정권'을 요구하는 헌법소원은 1999년 이후 두 번째인데 당시 헌재는 "선거의 공공성 확보가 어렵고 선거 비용 증가 등 국가적 부담이 가중된다"는 이유로 '선거권 제한`에 대해 합헌 결정을 내렸다. 그로부터 8년 여 지난 28일 헌재는 정반대로 "사실상 위헌"이라며 기존 판례를 뒤집었다. 이번에 헌재는 그 이유로 정보통신기술의 발달과 경제력 신장 등 10여 가지를 들었다. 재외국민들도 인터넷 등을 통해 후보자에 대한 정보접근이 가능하고, 해외 부재자투표를 함으로써 선거비용이나 국가적 부담이 증가하더라도 지금의 경제력으로는 능히 감당할 수 있다는 것이다.
납세와 국방의무를 이행하지 않는 재외국민에게 왜 선거권을 주느냐는 반대 논리에 대해 헌재는 "우리 헌법이 국민의 기본권 행사를 납세나 국방의무에 대한 반대급부로 예정하고 있지 않을 뿐 아니라 재외국민도 병역의무를 이행할 수 있고, 병역의무와 무관한 여자들도 있다"며 받아들이지 않았다.
재외국민 투표권 대선쟁점 부상
헌재는 결정문에서 투표권 대상과 시기 등에 대해 국회에 위임했다. 이제 국회가 각 정당 간 협의를 통해 결정해야 한다. 이 문제는 이번에 처음 나온 것이 아니다. 현재 국회 행정자치위원회에는 이들 조항을 포함한 선거법 개정안 7건이 올라가 있다.
투표율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재외국민의 투표가 전면적으로 이루어지는 날엔 선거에 적잖은 영향을 미칠 것으로 예상된다.
2005년 12월 말 현재 주재원과 유학생 등 국외 체류자는 약 115만 명, 외국 영주권자는 약 170만 명 등이며 이들 중 한국의 인구 대비 유권자 비율인 73.5%를 대비한 210 만 명이 선거권이 있는 19세 이상 인구로 추정되고 있다. 50만표 안팎의 박빙 승부까지 연출했던 역대 대선을 감안하면 앞으로 선거에 엄청난 변수로 등장할 것임에 틀림없다. 2002년 대선에서는 57만표, 1997년은 39만표 차로 1ㆍ2위가 갈렸다. 이러다 보니 정치권에선 벌써부터 선거전략 차원의 당리 당략적 표 계산만 앞세우는 모습도 보이고 있다. 장ㆍ노년층에 기대를 걸고 있는 한나라당은 올해 대선부터 재외국민에게 투표권을 부여할 수 있도록 정치개혁특위를 조속히 구성해 관련 법 개정을 서두르자고 하는 반면 열린우리당은 선거관리상 문제점이 별로 없는 단기체류자부터 투표권을 준 뒤 영주권자로 확대하자고 주장하고 있다. 유학생 등 젊은 층을 겨냥한 포석이다. 해외 장기거주자일수록 보수적 성향을 갖는다는 통념이 양당 입장차를 극명하게 가르는 배경이다.
재외국민 유권자 210만 명 추정
선거관리위원회는 재외국민 투표를 위해서는 최소한으로 잡아도 준비기간이 6개월은 필요하지만 국회에서 결정만 해주면 단축할 수도 있다는 입장이다. 따라서 이번 대선 때 단기 체류자든 영주권자든 투표권을 행사하기 위해서는 빠른 시일 내에 선거법 개정안이 국회를 통과해야 한다. 연말 대선에서 재외국민이 투표권을 행사할 수 있으려면 적어도 8월 이전에 선거법 개정안이 통과돼야 한다. 임시국회가 7월 중 다시 열리더라도 극적인 타협이 없는 한 연말 대선 때부터 재외국민이 투표권을 행사하기는 쉽지 않아 보이는 게 현실이다.
해외 선거구를 어떻게 확정할지부터 난제다. 또 재외국민에 대한 신분확인, 투표 방법에는 보안문제가 뒤따른다.
대통령선거에선 거주지가 어디냐가 문제 없지만 총선에선 문제가 된다. 그래서 중앙선관위와 한나라당은 대선과 총선의 비례대표 선거에서만 적용하자고 주장하고 있다. 지역구에 출마한 총선 후보에까지 확대하려면 별도의 대책이 마련돼야 한다.
투표방법에 대해서는 재외공관에 나가서 투표하는 방법이 가장 가능한 방법이다. 우편이나 인터넷을 통해 부재자투표를 하는 방식이 있지만 아직 정치권에서 합의된 것은 없다. 우편ㆍ인터넷을 이용하려면 비밀선거의 원칙을 어떻게 지킬 수 있느냐 와 본인 투표 여부를 확인할 수 있는 후속대책이 필요하다.
개정안 조기 국회 통과가 관건
다른 나라의 경우는 어떨까. 세계적으로 92개 국가가 재외국민의 부재자 투표를 실시하고 있으며, 특히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입 30개국 중 재외국민의 투표권을 인정하지 않는 나라는 한국, 터키, 멕시코, 헝가리 등에 불과한 것으로 알려졌다. 선진국에서는 재외국민에 참정권을 부여하는 것이 대세인 셈이다.
미국ㆍ영국ㆍ프랑스 등 대부분의 OECD 국가들이 해외 단기 체류자나 영주권자는 물론 이중국적자에게도 투표권을 주고 있다. 한국의 경우도 1966년 대통령 선거 때부터 재외국민에게 선거권이 주어져 한때 파월 국군과 서독 취업 광부ㆍ간호사 등이 투표를 했다.
하지만 1972년 통일주체국민회의법 시행으로 기존 대통령선거법이 폐지되면서 국내 거주자만 부재자 투표를 할 수 있도록 관련 법규가 개정됐고 그 후 재외국민은 지금까지 선거에 참여하지 못하고 있다.
국내에 주민등록이 없는 재외국민에게도 선거권을 주는 게 마땅하다는 이번 헌법재판소 결정은 그동안 700만 재외동포들이 간절하게 바랐던 염원을 실현시켜줄 것이라는 점에서 환영받아 마땅하다.
이는 투표에 직접 참여하느냐 하지 않느냐 하는 문제를 떠나 그 동안 한국 내 부정적인 시각이 없지 않았던 재외국민의 위상을 정립할 수 있는 중요한 계기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와 함께 한국 정부는 이번 기회에 재외동포재단을 청 단위로 격상시켜 업무 범위를 확대하는 등 한민족 네트워크 관점에서 재외동포 정책을 큰 틀부터 다시 짠다는 구상 아래 재검토야 할 것이다. 전 세계로 뻗어 간 재외국민은 한국의 귀중한 인적자원의 보고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