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미국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을 비판하는 발언을 한 영국 주재 대사관의 필 고프(Phil Goff) 고등판무관에 대해 윈스턴 피터스(Winston Peters) 부총리 겸 외무부 장관이 전격 해임한 사건을 두고 많은 말이 오가고 있다. 고프 고등판무관의 발언이 적절하지 않았기 때문에 해임이 정당하다는 의견과 함께 뉴질랜드 정부가 도 넘은 ‘트럼프 눈치 보기’에 굴욕적이라는 비판도 나온다. 또한 피터스 장관은 현 국민당 주도 연정 소속 우파 포퓰리즘 정당인 뉴질랜드제일당 대표로 과거 반이민 정책 등으로 정치계에서 뉴질랜드의 트럼프로 거론되기도 했고, 이번 해임 결정도 자신이 크리스토퍼 럭슨(Christopher Luxon) 국민당 대표를 (연정을 통해) 총리로 만들었기 때문에 럭슨 총리와 사전 협의하지 않았다고 말하면서 논란을 더했다.
“트럼프가 역사를 알아?” 발언 고등판무관 해임
이번에 해임된 고프 고등판무관은 지난 1981년 국회에 진출하여 외무부 장관, 국방부 장관 등을 포함하여 20여개의 장관 및 협력장관직을 역임했고 2008~2011년 노동당 대표를 맡았던 베테랑 정치인 출신이다.
2016년 오클랜드 시장에 선출된 그는 2022년 오클랜드 시장 3선에 나서지 않았고 2023년 1월에 영국 주재 대사관의 고등판무관으로 임명됐다.
고프 고등판무관은 지난 4일 런던의 국제 문제 싱크탱크 채텀하우스 주최로 열린 포럼에 참석했다.
고프는 핀란드 외무장관 엘리나 발토넨의 연설에 청중으로 참석한 자리에서 질문 및 답변 시간에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 지도자인 윈스턴 처칠(1874∼1965년) 전 총리와 비교하면서 트럼프 대통령의 역사 이해에 의문을 제기하는 발언을 했다.
고프는 “1938년 뮌헨 협정 이후 처칠이 하원에서 한 연설을 다시 읽었다”면서 처칠이 나치 독일에 유화적인 협정을 주도한 네빌 체임벌린(1869∼1940년) 당시 영국 총리를 향해 “’당신은 전쟁과 불명예 사이에서 선택했다. 당신은 불명예를 골랐지만, 전쟁을 겪을 것’이라고 말했다”고 언급했다.
이어 “트럼프 대통령은 처칠 흉상을 오벌오피스(백악관 집무실)에 다시 설치했다. 하지만 그가 정말로 역사를 이해한다고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그의 질문에 청중들은 웃음을 터뜨렸다.
발토넨 장관은 “처칠이 매우 시대를 초월한 발언을 했다고만 말하고 싶다”며 외교적인 답변을 했다.
발토넨의 이날 연설은 ‘러시아와 가장 긴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국경의 평화 유지’라는 주제로 열린 행사에서 이뤄졌으며 유럽 안보에 대한 핀란드의 접근 방식을 다뤘다.
1938년 9월 체결된 뮌헨 협정은 영국•프랑스가 나치 독일의 체코 일부 지역 병합을 인정하는 것을 골자로 한 합의다.
체임벌린 총리 등의 유화책은 아돌프 히틀러의 영토 팽창 야욕을 키워 제2차 세계대전을 초래한 서방 외교정책의 대표적 실패 사례로 꼽힌다.
고프의 발언은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러시아에 유화적인 자세로 평화 협상을 주도하는 트럼프 대통령을 완곡하게 비판한 것으로 해석된다.
피터스 장관, 총리와 협의 않고 전격 해임 결정
고프 고등판무관이 트럼프를 언급하며 한 질문에 답해 피터스 외무장관은 “매우 실망스럽다”며 “이는 뉴질랜드 정부의 견해를 대변하지 않으며 고등판무관으로서 그의 지위를 더 유지할 수 없게 만들었다”며 전격 해임의 이유를 설명했다.
피터스 장관은 “고위 외교관의 자리는 정부를 대표하며 뉴질랜드의 얼굴”이라고 말했다.
그는 고프가 오랜 기간 뉴질랜드 국익에 기여했고 그의 해임 결정이 어려웠다고 덧붙였다.
그와 고프 고등판무관은 지난 2005~2008년 헬렌 클라크(Helen Clark) 노동당 3기 정부 때 외무장관과 통상장관으로 같이 일한 전력도 가지고 있다.
피터스 장관은 다가올 런던 주재 뉴질랜드 대표부의 인원 교체 때 고프 고등판무관 문제도 처리될 것이라고 말했다.
피터스 장관은 현 국민당 주도 연정 소속 우파 포퓰리즘 정당인 뉴질랜드제일당 대표다.
그는 과거 반이민 노선과 논란적인 발언들로 뉴질랜드 정가에서 트럼프를 가장 닮은 정치인으로 거론되기도 했다.
피터스 장관은 이번 고프 고등판무관의 해임 결정에 대해 자신이 럭슨 국민당 대표를 총리로 만들었기 때문에 럭슨 총리와 사전 협의가 필요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럭슨 총리는 “피터스 장관의 결정이 매우 적절했고 내가 열외 취급을 받았다고 느끼지 않는다”고 말했다.
해임을 가져온 고프의 발언은 시기적으로도 좋지 않았다.
피터스 장관이 지난 13일부터 마르코 루비오 미국 국무장관 등과 회담하기 위해 미국을 방문할 예정으로 있었기 때문이다.
중국에 대한 수출이 매년 줄고 있는 가운데 미국에 대한 연간 수출액은 9월 기준 2021년 99억달러에서 2024년 157억달러로 58.6% 증가하면서 교역의 관점에서도 미국은 뉴질랜드에 있어 중요한 상대국이다.
피터스 장관의 방미는 장기간의 경제 침체를 겪고 있는 뉴질랜드 경제에 그나마 빛이 되고 있는 미국과의 관세 전쟁을 피하고 트럼프 행정부와 호혜적인 관계를 유지하기 위함이다.
지난 2월 28일 워싱턴에서 열린 트럼프 대통령과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의 회담이 공개적인 고성 언쟁 속에 합의 없이 마무리된 이후 국제 사회에서 강력한 동맹 관계는 더욱 균열되고 있다.
취임 이후 정상회담때마다 마치 TV 리얼리티 쇼를 하듯 취재진이 있는 상황에서 수십여분씩 기자들의 질문에 답하는 트럼프 대통령의 독특한 스타일로 인해 두 정상의 말싸움은 전세계에 그대로 중계됐다.
이 회담을 지켜본 세계 각국 외무장관이나 정상들은 자신이 그렇게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을 가질 수 있을 정도로 초현실적이었다.
이번 고프 고등참무관의 해임 결정에 대해 뉴질랜드 주재 미국대사관측은 뉴질랜드 정부의 일이라는 짧은 논평을 내놓았다.
와이카토 대학의 알렉산더 질레스피(Alexander Gillespie) 법학 교수는 고프 고등판무관의 발언이 선을 넘었다며 그의 해임 결정이 정당하다고 주장했다.
질레스피 교수는 “고프 고등판무관은 뉴질랜드의 외교관이나 대사들처럼 동의하든 동의하지 않든 뉴질랜드의 견해를 대변한다”며 “지금 트럼프 행정부에 대한 뉴질랜드의 의견은 침묵이고 어쨌든 트럼프 대통령에 비판적이지 않거나 불쾌하지 않게 하려고 노력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뉴질랜드 정부가 채택한 접근 방식이 문제시되는 부분이 있는 것으로 생각한다”면서도 “법학 교수로서 내가 말하는 것은 상관 없지만 뉴질랜드 정부를 대변하는 고프가 말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고 말했다.
그는 고프가 훌륭한 뉴질랜드인이고 역사에 대한 그의 이해는 맞다면서도 뉴질랜드 정부를 대표하기 때문에 그의 견해를 밝히지 않아야 했었다고 지적했다.
특히 지금은 어느 때보다도 전략과 외교가 필요한 시기라는 것이다.
질레스피 교수는 “고프의 발언에 놀랐고 대중 포럼에서 그런 발언을 한 것은 현명하지 않았다”고 짚었다.
트럼프 행정부에 너무 민감한 뉴질랜드 정부 비판
고프의 장관 재임 시절 노동당 정부를 이끈 클라크 전 총리는 엑스(X•옛 트위터)에 이번 발언 논란이 매우 존경받는 전직 장관을 경질하기에는 매우 빈약한 변명이라면서 해임 결정을 비판했다.
클라크 전 총리는 “나는 최근 다녀 왔던 뮌헨안전회의에서 많은 관계자들이 1938년 뮌헨 협정과 현재 미국의 행동을 비교했다”며 “언뜻 봤을 때 고프의 그 질문은 해임할 만한 발언이 아니다”고 옹호했다.
그러면서 뉴질랜드 정부가 트럼프 행정부에 너무 민감한 것 아니냐는 비판을 제기했다.
노동당의 크리스 힙킨스(Chris Hipkins) 대표는 고프의 발언이 선을 넘었다면서도 정치와 외교 사이에 구분하기 어려운 점이 있다고 지적했다.
힙킨스 대표는 “고프의 발언은 외교관으로서는 정치적이었다”며 “만약 정치인이 그런 발언을 했다면 눈도 깜빡이지 않았을 것이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나 또한 트럼프 대통령의 지난주 언행에 대해 매우 비판적이지만 나는 정치인이고 외교관과는 다르다”며 “외교관이 사용하는 언어는 좀더 신중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그는 고프의 발언이 정치적이긴 했지만 해임할 만할 정도로 심각했는지에 대해서는 의견을 밝히지 않았다.
과거 트럼프를 비판했다가 곤경에 처한 외교관의 전례가 있다.
2019년 킴 다로치 전 미국 주재 영국 대사는 자국 정부에 보낸 내부 전문에서 트럼프를 ‘무능하고’ ‘제대로 굴러가지 않으며’ ‘예측할 수 없다’는 표현을 했다가 내용이 유출됐다.
이에 트럼프는 “우리는 더 이상 그를 상대하지 않을 것”이라고 경고하며 외교 문제로 비화한 바 있다.
녹색당의 리카르도 메넨데즈 마치(Ricardo Menendez March) 의원은 뉴질랜드 정부가 트럼프 행정부의 행동에 대해 보다 강경한 입장을 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고프의 발언이 해임할 만한 것인가에 대해 “뉴질랜드 정부가 외교 단체를 의도적으로 조정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트럼프 행정부가 가자지구 소유 계획과 같은 발언을 할 때 뉴질랜드 정부는 더욱 강한 입장을 취했어야 했다”고 말했다.
미국과 유럽 중 선택 강요 받을 수도
이번 고프 고등판무관의 해임에 대해 질레스피 교수는 뉴질랜드 정부가 트럼프 대통령의 반응을 미리 우려하여 결정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트럼프 대통령의 반응이 매우 격렬하고 종종 혼란을 불러 오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최근 트럼프 행정부가 우크라이나와 전쟁 중인 러시아와 화해 움직임을 보이면서 뉴질랜드가 포함된 세계 최강 정보 동맹인 ‘파이브 아이즈(Five Eyes)’가 위태로워지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파이브 아이즈는 미국, 영국,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가 구축한 정보 공유 네트워크로 제2차 세계대전 이후 80년간 유지돼 오고 있다.
트럼프 2기 행정부가 기존 영미권 국가들의 주요 첩보 대상국인 러시아와 밀착하는 점이 우려를 낳고 있다는 분석이다.
트럼프 행정부는 이달초 영국과 같은 동맹국들에게 미국에서 파생된 정보를 우크라이나와 공유하지 말도록 지시했다.
이는 우크라이나의 군사 작전과 러시아 미사일 및 드론 탐지 능력에 큰 타격을 주는 조치로, 영국 정보기관도 이 제한 대상에 포함된 것으로 알려졌다.
이 조치는 트럼프 대통령이 우크라이나에 대한 모든 군사 원조를 중단한 직후 발표됐다.
미국 NBC 뉴스는 지난 6일 미국의 핵심 정보동맹국 중 일부 국가들이 미국과의 정보 공유 범위를 축소하고 제한하는 방침을 검토중이라고 보도했다.
보도에 따르면, 이들 동맹국 일부는 미국에 공유한 정보로 인해 자국의 첩보 역량과 해외 전략 자산이 드러나는 것을 우려하고 있다.
미국과의 정보 공유 수준을 낮추는 방안을 검토중인 동맹국들은 미국에 전달한 정보로 인해 외국에서 활동하는 자국 정보요원 신원이 드러날 가능성까지도 걱정하는 것으로 전해졌다.
미국의 기존 정보 공조 체계가 깨질 가능성이 제기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이에 앞서 파이낸셜타임스(FT)는 지난달 25일 미국과 캐나다의 통상 분쟁으로 말미암아 미국이 캐나다를 파이브 아이즈에서 제외하는 방안을 검토했다고 보도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캐나다를 미국의 51번째 주로 편입하고 싶다고 밝히고 북미3국 자유무역협정(USMCA)에도 캐나다로부터 수입되는 대부분의 상품에 대한 25% 관세 부과를 명령했다가 한 달 간 유예를 반복하면서 관계가 이전 같지 않다는 반응이 나오고 있다.
질레스피 교수는 뉴질랜드가 전통적인 동맹 관계인 미국과 유럽 중 한 쪽의 선택을 강요당할 것이고, 어느 선택이든 위험성이 있다고 분석했다.
2월 28일 트럼프 대통령과 최악의 회담을 마친 다음날 영국을 방문한 젤렌스키 대통령을 키어 스타머 영국 총리는 환대하며 22억6,000만파운드 규모의 추가 차관 지원에도 서명했다.
이렇듯 강력한 동맹 관계는 옛말이 되었고 미국과 유럽은 정치적, 경제적으로 분열 양상을 보이고 있다.
뉴질랜드 정부는 러시아의 비난에도 불구하고 우크라이나에 군사훈련, 정보 등에 약 3,500만달러를 지원했고, 추가로 3,200만달러 규모의 인도주의적 원조를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