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야 누나야 해변 살자

엄마야 누나야 해변 살자

0 개 933 한일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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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     
뜰에는 반짝이는 금모래 빛 
뒷문 밖에는 갈잎의 노래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

김소월 시인(1902, 8 - 1934, 12)은 일제 강점기에 우리 민족이 아름다운 자연 속에서 가족과 단란하고 평화롭게 살고 싶은 소망을 시를 통해서 토해냈다. 1923년 동경상과 대학 재학 중 관동 대지진으로 학업을 중단하고 고국에 돌아와 시작(詩作) 활동을 계속하여 왔으나 연속 되는 불운으로 생활고에 시달리게 되고 한창 젊은 나이 32세에 음독자살을 하고 만다. 시인은 한(恨), 꿈, 그리움을 노래했으며 이는 우리 민족이 수 천 년 동안 품고 내려온 정서이다.

지금은 한국의 어느 곳을 가 봐도 우리가 어렸을 적의 강변 이미지를 찾기가 힘들다. 그 때는 시골의 냇가에도 제법 백사장이 있었으며 동네 아이들이 여름철에 수영을 즐김은 물론 각종 놀이나 스포츠를 즐기는 운동장이기도 했다. 서울을 관통하는 한강은 광나루에서부터 행주산성까지 곳곳에 백사장과 강변 수영장이 연달아 있었다. 

뉴질랜드에 와서 잃었던 자연의 보물들을 되찾았다는 생각을 하면 한결 흐뭇해지기도 한다. 강변이 흔한 것은 아니지만 아름답기 그지없는 해변들이 도열해 있는 뉴질랜드이다. 뉴질랜드에 처음 와서 제일 먼저 탄성을 자아내는 일은 무지개를 봤을 때이고 유난히 가까이서 반짝이는 별들과 은하수, 쟁반 같은 달, 바다에서 떠오르는 태양, 찬란히 빛나는 석양의 하늘을 볼 때마다 감탄을 하게 된다.

오클랜드에는 유난히 해변이 많다. 지도를 펼쳐보면 해안선의 오밀조밀함에 놀라게 된다. 아무리 신(神)이 설계했다고 하더라도 이렇게 까지 배려를 많이 했을까? 하는 의구심을 품게 된다. 

우선 오클랜드 시티 중심부를 휘어 감고 있는 바다를 보살펴 봐도 그 오묘함을 알 수 있다. 세계로 향하는 오클랜드의 안마당인 와이테마타 하버(Waitemata Harbour)는 외곽에서 코로만델 반도와 그레이트 베리어 섬이 1차 방어를 해주고 있다. 하우라키 걸프의 영역에서 황가파라오아 반도와 티리티리 마탕이 섬이 2차 방어를 해주는 가운데 이스트 코우스트 베이스 지역의 아름다운 경관과 옆으로 도열해 있는 노이시즈, 라키노, 모투타푸, 랑기토토 섬들의 호위를 받고 있다. 동쪽으로는 와이헤케와 포누이 섬들이 외풍을 막아주고 있으며 모투이히와 모투 코레아 섬들이 시중을 들어주고 있다. 다시 남북으로 길게 뻗은 데본포트가 수문장 역할을 하고 있다. 

와이테마타는 하버 브리지를 통과 해 뒷마당을 형성하며 북쪽으로 서쪽으로 남쪽으로 깊숙이 바다를 연장해주고 있다. 와이테마타 하버는 다시 동쪽으로 타마키 스트레이트와 연결되고 있다. 마누카우 하버는 태즈먼 해에서 시티 중심부 서남쪽을 감싸고 깊숙이 들어와 있다. 와이테마타 동쪽에서 서남쪽으로 깊숙이 들어와 있는 타마키 강과 마누카우 하버 동쪽 끝과는 아슬아슬하게 육지로 연결되어 있다. 마찬가지로 와이테마타 서쪽 끝에서 남쪽 블록하우스 베이 쪽으로 깊숙이 들어와 있는 바다와 마누카우 하버 북쪽이 지협으로 연결되어 있다. 만일 이 두 군데 지협이 바다로 연결 되었다면 오클랜드 중심부는 완전히 섬이 되는 것이며 뉴질랜드는 남섬과 중섬 북섬으로 불려 질 판이었다. 

해변으로 가자. 바닷가 집이 아니더라도 오클랜드 어디에서든 차로 10분이면 해안가에 당도할 수 있다. 늪지대 곳곳에는 뉴질랜드 갈대 토헤토헤(Tohetohe)가 깔려 있다. 만일 소월 시인이 오클랜드에 살고 있다면 어떻게 노래할지 궁금하기도 하다. ‘아마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라고 꿈꾸었던 소망이 오클랜드에서 이루어질 수 있는 찬미의 노래를 시로 읊었으리라 짐작한다. 

낙원과 유토피아는 이 세상에 실재로는 존재할 수 없는 이상향이다. 유토피아(Utopia)는 토마스 모어의 이상 사회를 기술한 소설 이름이지만 원래 유토피아의 뜻은 그리스 어의 ‘없는 장소’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 세상 어느 곳에 낙원과 유토피아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까마는 그래도 뉴질랜드가 이상향에 제일 가깝다고 표현하는 데는 무리가 없다. 

행복의 파랑새를 손에 쥐고 다른 새를 잡으려고 손을 벌리는 순간 파랑새는 날아가 버리고 다른 새도 잡지 못하는 허황된 일이 벌어져서는 안 될 것이다. 우리는 어떤 연유에서든 뉴질랜드에 왔고 이곳에서 제 2의 인생을 살아가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들의 고향을 만들어가야 되지 않을까?
[이 게시물은 KoreaPost님에 의해 2014-07-08 17:34:14 칼럼에서 복사 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