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밤, 나는 자다가 벌떡 일어났다. 옆에 같이 자고 있는 여자가 영어를 막 지껄이는 바람에,
아니...? 내가 지금 남의 집에서 자고 있는가? 얼른 방 불을 켜 보니 아내가 입을 헤 벌리고 자고 있었다.
이젠, 잠꼬대까지 영어로 하고, 근데 완전 본토 발음이야...
아예 머리도 노란색으로 염색하라고 할까...? 영어도 잘 지껄이겠다...
아내는 매일 성당에 새벽미사를 드리러 다닌다.
신부님 강론도 매일 듣고 성당 사람들과도 되든 안 되든 매일 만나 말을 하다 보니 영어가 너무 잘 들린다고 한다.
그렇게 되기까지는 옆에서 희생하는 사람이 있기 마련이다.
나는 매일 아침을 굶거나 차려 먹어야 하고 우리 집에서 성당까지는 15km가 넘으니 기름 값은 좀 많이 드나,
다 내가 뒷바라지를 해 준 덕에 아내는 영어를 잘 알아듣는 것이다.
지난해 부활절 전에 성당 복도에서 톰 신부님을 만났는데,
“하이~ 폴.” 신부님은 반가워하며 나에게 악수를 건네셨다. 이번 부활절 미사 때 신부님이 12제자의 발을 닦아주는데 폴도 12제자 중에 한 사람으로 선택되었다고 말씀 하셨다. 아내는 옆에서 너무 좋아하여서 그 날 난 뭔 약속이 있는 것 같은데 당신이 대신 나가지 하고 말했더니 막 성질을 부렸다.
부활절 미사 때에는 복도까지 사람들이 꽉 차 있었다. 앞에 12개의 의자가 놓여 지면서 진행하시는 분이 나에게 와서 뭐라고 말을 하는데 말이 너무 빨라 나는 한마디도 못 알아들었다.
이런 때는 딸이라도 옆에 있어야 하는데... 옆에 있던 아내가 자상하게도 해석을 해주었다.
나보고 그대로 앉아 있다 가 내 이름을 부르면 앞에 나가서 의자에 앉은 후 신발과 양말을 벗으라는 말이라고 하였다.
이곳 성당건물은 한국처럼 긴 직사각형 형태가 아니라 부채꼴 모양으로 만들어져 누구나 신부님과 가까이 접할 수 있고 마주보는 느낌을 주는 아늑한 분위기이다.
가운데 자리는 좌우 모든 시선이 집중되는 자리이기 때문에 나는 내 이름을 부르자마자 후다닥 뛰어 나가서 맨 갓 의자에 앉아야겠다고 마음먹고 긴장하면서 기다리고 있었다.
잠시 후, 내 이름을 부르는 순간 후다닥 뛰어 나갔는데 맨 갓 의자는 이미 다른 사람이 차지했고 나는 2번째 의자에 겨우 앉을 수 있었다. 그런데 앞에서 사람들이 막 웃었고 누군가 나를 불렀다.
좌우로 두리번 거려보니 모두 맨발로 나와 앉아 있었고 나만 혼자 양말과 구두를 신고 있는 것이었다.
나는 얼른 내려가서 구두와 양말을 벗고 다시 올라가 보니 내 자리는 누가 이미 차지했고, 맨 가운데 한 자리만 비어 있었다.
조명도 유난히 밝고 모든 시선이 집중되는 맨 가운데 자리에 앉아 나는 천장만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생각했다.
믿을 사람 말을 믿었어야지, 어쩌다 아내 말을 곧이듣다니... 그리고 또 이런 생각도 들었다.
이 많은 금발 아줌마들이 맨 가운데 앉아 있는 멋진 동양남자를 바라보면서 얼마나 마음이 설레고 들떠 있을까...?
내가 천장을 바라보며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신부님은 12제자의 발을 닦아 주기 위해 오른쪽 사람부터 발을 닦아 주시며 내 곁으로 오시고 있었다.
톰 신부님은 나의 발을 닦아 주시면서 뭐라고 말씀하셨는데 이런 말씀을 하시는 것 같았다.
“폴, 네가 맨 가운데에 앉아 있으니 성당이 너무 환해진 것 같다.”
신부님은 내가 성체를 모실 때에도 꼭 내 이름을 부르곤 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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