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9] 고국에서 가을 단풍이…

[349] 고국에서 가을 단풍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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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가 바뀌니 내가 원치 않아도 어김없이 또 나이 하나를 보탠다. “형님은 이제 ㅇ십대네요. 나는 아직 ㅇ십대인데…” 세살 아래인 흉허물없는 사이의 어떤 자매님이 짠한 메세지를 띄운게 엊그제만 같은데 벌써 새해의 카렌다를 바꿔 달았다. 서울에서는 육 백년만에 맞는 황금돼지해라나. 덕담이 적힌 카드와 편지들이 날아오고. 이제 나에게 좋은 일이란 그저 매일매일이 오늘처럼 건강하기만을 바랄 뿐 그 이상의 아무 것도 바랄 수 없는 그런 나이가 아닌가.

  편지를 펼쳐드는 순간 우수수 무언가가 발등으로 떨어지는 것이 있었다. 아기손같은 귀여운 빨간 단풍잎들. 지난 가을을 알리고 처연하게 떨어져 사람들 발밑에 채여 사라져 버릴 것들이 용케 행운을 얻어 여기까지 멀리로 날아온 고국의 단풍잎을 보면서 잠시 코끝이 시큰해졌다. 잎이 터서 자라고 파아란 청춘을 지나서 붉게 늙어 한세상 보내고 낙엽되어 떨어진 단풍잎. 그것들을 보며 마치 내 일생을 보는 것같아 마음이 착잡했다.

  “엄마 특별한 생일 그냥 넘기면 안되요. 친구들 모시고 멋진 잔치하세요.”선뜻 달려오지 못하고 안타까움, 송구스러워하며 정성으로 보내 온 값진 돈.(내 인생이 뭐 그리 대단하다고? 이 나이까지 내가 뭘 했다고?) 불황에 벌기 어려운 자식의 귀한 돈 헛되이 하고 싶지 않아 어느 ㅇㅇ에 기부해 버리고 입 싹 씻는 것도 어느 일면 내 나이를 세상에 알리고 싶지 않은 조용한 오기가 포함되었으리라.

  “오늘 제게 무슨 일이 생길지 저는 모릅니다.”로 시작되는 하느님께 맡기는 기도문이 내 가슴을 울렁거리게 한다. 보내준 분의 마음에 감동을 받으며 아직은 시시한 나이타령이나 하기보다는 시월이 한창인 설악산 단풍이나 떠올려 보는 게 나을 것같다. 내 고국 나드리는 단풍철 시월에 할꺼라고 늘 그렇게 생각해 왔는데 정곡을 찌른 데레사님의 마음 고맙기만 하다.

  온 산이 불빛으로 환하게 물드는 설악의 아름다운 가을단풍. 지치도록 사시사철 꽃 속에 묻혀 살아도 내 조국의 그것은 기억속에서 영원히 살아 꿈틀거리기 때문에 잊을 수가 없다. 그 유명한 가을 설악산을 말로만 듣다가 오 십대 첫나드리 때 접했기에 그 때의 흥분이 아직도 식지 않아 가을철만 되면 작은 동요가 일곤 하나보다. 유난스레 잘생긴 고운 빛의 잎새를 찾아 흐르는 계곡물에 내 염원을 담아 조용히 흘려 보내며 그 황홀감에 도취되어 발길을 돌릴 수가 없었다. 빨갛고 노랗고 진하고 연하고 형언할 수 없을만치 다양한 컬러의 조화로움은 그 어느 꽃동산보다 황홀하고 경이로웠다. 이글 이글 마치 불길속을 걷는 것처럼 가다보면 내가 단풍이 되고 단풍이 내가 된 것처럼 홀려 버린다. 투명하게 나풀거리는 붉은 잎들의 군무. 땅에 떨어져 깔린 잎새들은 밟기조차 안쓰럽게 곱디 고운 융단으로 철퍽 주저앉아 질펀하게 놀다 가기를 유혹하기도 한다. 그 오묘한 하느님의 작품을 내 짧은 필력으로 어찌 그려낸단 말인가. 그동안 접고 살았던 고국의 향수를 마냥 불러 일으키는 단풍잎들. 문득 데레사님의 얼굴을 떠올려 본다. 앗차! 아무리 생각해도 그의 얼굴모습을 확연히 찾아 낼 수가 없어 미안스럽고 안타깝다. 아주 짧은시간 만났다 헤어진 여인. 그리고 다시 만나지 못한 세월이 얼마인가. 사랑을 직접 실천으로 옮기는 마음씨 예쁜 그 분을 오래 오래 머리속에 각인시켜 두지 못한 내가 부끄럽고 민망스럽다.

  단풍잎을 오래 들고 드려다 보니 사물사물 시야로 들어오는 그림 하나가 또 떠오른다. 양손에 손뜨게로 뜬 장갑을 끼고 열 손가락을 부채살처럼 좍-펴서 든 내 아이의 귀여운 손이 그 단풍잎 위에 오버랩으로 보인다. 앙징스럽게 작은 손에 장갑을 끼워주면 아이는 늘 그런 모습으로 좋아하곤 했다. 귀찮아서 벗어 버리는 아이들이 많은데 그 아이는 유난히 장갑을 좋아해 심심풀이 내 뜨게질을 신나게 부추기곤 했었다. 이제 아이는 그 때의 내 나이보다 더 많은 중년이 되었고 나는 할머니가 되었다.

  별 것 아닌 지나간 일상들이 문득 견딜 수 없는 추억의 정서로 떠오르는 것을 보면 나도 어쩔 수 없이 늙었음에 틀림없다.
  “주님께서 원하시거나 허락하시는 모든 것을 어려움 중에 참으며 온전히 순종하게 하소서”
    하느님께 맡기는 기도의 끝자락이다. 보내신 데레사님의 뜻을 마음깊이 새기며 열정으로 붉은 단풍을 닮아 열심히 한 해를 살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