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9] 낙엽따라 떠난 갈색의 낭만

[309] 낙엽따라 떠난 갈색의 낭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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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이 잘 맞는 자매님 내외와 흣날리는 낙엽따라 가을 여행을 떠난다. 눈물이 날 것만 같은 이 쓸쓸한 계절에 갑자기 들뜬 낭만으로 가슴이 설레인다. 계획없이 이루어진 밤 농장이 목적지.
  가죽시트 편안한 벤츠차에 앉으니 천리만리라도 갈 것같은 기분이 든다. 사실은 커뮤니케이션이 잘되는 네 사람이 처음으로 함께 했다는게 더 솔직한 맛이겠지. 낮게 내려앉은 하늘, 구름이 해를 가리워 뜨겁지도 않아서 더욱 다행이라는 금상첨화론까지……. 새하얀 은발을 바람에 휘날리며 무리진 갈대의 군무가 화려하다 못해 황홀하다.
  검은 장막같은 구름사이로 가늘게 쏟아져 내리는 금빛 부채살이 말로 표현하기 어렵게 찬란하다. 허지만 이슬비같은 작은 빗방울이 소리없이 차장에 내려 앉는다. 변덕날씨에 익숙해진 우리가 까짓것 걱정될리 없지. 아니나 다를까 금방 언제 그랬냐는 듯이 햇님이 방긋 웃어준다. 앞쪽 먼 하늘 진회색 구름을 배경으로 이번에는 초연히 무지개가 나타난다. 일곱색깔 고운 하모니가 들뜬 여행객의 눈길을 마냥 사로잡는다.“참,
아름답다”이럴땐 내가 뉴질랜드에 처음 온 사람처럼 새롭고 생소해서 신음같은 찬사가 절로 나온다.
  초행길에 목적지를 잘 몰라 차를 세우고 길에 나서보니 사람하나 볼 수 없는 드넚은 초원뿐. 사방을 둘러봐도 한가롭게 풀을 뜯는 양떼들과 여유롭게 노는 우공들 뿐이다. 여기가 광야일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든다. 손을 들어 달리는 차를 세워봐도 핑핑 무응답으로 달아나고….
  밤을 싸게 사야 하니까…, 경제성을 따지는 장난끼 어린 친구. 까짓거 밤이 문제야 나왔으니까 그냥 하루 즐기는 거지. 내 괴변이 엇갈리는 찰나다 그러나 곧 반가운 이정표가 눈에 들어 왔다.
  밤동산을 연상했던 예상이 빗나가고 그야말로 평지에 밤 밭이 없다. 사람들이 엎디어 밤을 줍는데 모두가 한국인들 뿐이다. 여기가 한국 어디쯤일까? 처음으로 와 본 밤 농장. 바닥이 온통 밤송이로 깔려있어 정신없이 줏어 담는데 그것은 썩은 것일테니 알아서 잘 고르란다. 밤을 줍는게 아니고 낭만을 줍는 것이니 내겐 상관없는 잔소리인 것을.
  까시가 매서운 밤송이를 어쩌려고 장갑도 없는 맨손의 내가 어처구니가 없다. 까시에 찔려 피도 흘리고 엄청 아퍼서 사전준비가 꼭 필요하다는 걸 깨달았다. 꽁꽁 몸을 사리고 수줍은 듯 붙어 앉은 의좋은 삼형제. 자라고 익어서 스스로 알밤이 되어 홀로 땅에 떨어진것들. 무에서 창조해낸 무한한 열매. 이 가을을 영글게 만들어준 계절의 선물이다. 자연의 경이로움에 잠시 숙연해지기로 하면서 문득 어머님 얼굴이 떠올랐다. 서울에서만 거의 사시던 분이 모처럼 시골에 가셨을 때의 이야기다. 아침 일찍 앞동산에 올랐더니 밤새 사납게 불던 바람으로 발갛게 익은 알밤이 우수수 떨어져 있어 급한 김에 치마폭에 가득 줏어 왔다는 부풋한 이야기를 옛날이야기처럼 신기하게 들었었다. 지금의 내 기분이 바로 그런 것일까? 길에 쏟아진 콩을 줍듯 마구 줏어 담았으니 아마 내것은 썩은게 반이나 될터, 나는 원래 앙그러진 이재와는 먼 사람이니까 실속이 없을 건 뻔하다. 그러나 계절 깊음 속으로 풍덩 빠져 나른한 마음을 흠뻑 적신 다는게 얼마나 멋진가.
  어느새 짧은 해가 서녁으로 기울어 있다. 생나무 담장 그늘에 자리를 만들고 가져온 먹거리를 준비한다. 삼겹살을 굽고 코펠에 밥이 되고 된장찌개가 끓는다. 수확의 풍요로운 농부의 마음으로 따끈한 들밥을 챙겨먹는 재미. 질펀히 깔린 갈색의 뜰을 뒤로하고 돌아 오는데 차창 밖으로 오클랜드의 하늘이 쌔까맣다. 복바치는 설움을 쏟아 내듯  기어이 소낙비가 한바탕 하는 모양이다. 올 가을엔 오늘의 추억이 담긴 낭만의 밤을 씹으며 쓸쓸함을 달랠 수 있을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