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6] 오클랜드의 겨울나기

[336] 오클랜드의 겨울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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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클랜드의 겨울은 삭막하다. “삭풍은 나무 끝에 불고 명월~”라는 김종서 시조가 떠오른다.
인간이 살기에 최적의 조건을 갖춘 도시라는 오클랜드-여름엔 사실 그말이 그대로 들어 맞는다. 쾌적하고, 푸르르고, 아름답고—하지만 겨울이 되면 얘기는 사뭇 달라진다. 그래서 뉴질랜드에 온 걸 후회한 적이 없는 나로서도 날씨에는 속았다고 생각한다. 정말이지 4월부터 9월까지 아니 때로는 11월까지도 을씨년 스럽기만 하다. 최근 어느 모임에서의 화두와 관심사는 ‘뉴질랜드의 겨울 나기’였다. 긴 겨울을 좀 더 재미 있고 보람 있게 보내기 위한 나름 대로의 정보와 노하우들을 쏟아 냈다. 바둑, 장기, 독서, 온실, 동남아 여행, ‘비디오 보면서 소주한잔 걸치기’, ‘비 오는 날에도 버티며 골프 치기’, ‘농장을 공동으로 빌려 여름에는 온실을 운영하고 겨울에는 비닐하우스 한동쯤에 아예 탁구장이나 족구장을 설치해 전천후 운동을 하자’는 등 갖가지 방법이 속출했지만 현실성도 의문이거니와 딱히 이거다고 할만한 아이디어는 떠오르지 않았다. 결국은 “각기 취향에 맞춰 살되 주말에는 비가 오더라도 골프치고 한잔하자”는 현재와 별반 다름 없는 결론으로 귀착 되고 말았다.

갑자기 다운타운의 ‘웨스트필드 쇼핑센터’ 좌측문 입구(Albert St.쪽)에 있는 대형 기념품점 ‘OK Gift Shop’이 생각난다. 대표가 흘러간 일본인 유명배우-우리의 김진규나 최무룡 같은-라는데 상점 입구에 그의 나무 입상이 KAL 사무소 입구에 서 있는 아가씨처럼 실물크기로 서 있다. 잘 알려진 그의 나무상을 보고 일본인들은 하이, 하이 하면서 반갑게 상점에 들어 선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는 놀랍게도 동경, 시드니, 벤쿠버등 세계 여러곳에 5-6개의 브렌치를 두고 있다는 것이었고 뉴질랜드에만도 오클랜드와 크라이스쳐치에 각각 지점을 갖고 있었다. 이미 오래전에 은막에서 은퇴한 그는 사업가로 변신, 따뜻한 나라를 찾아 브렌치를 순회하면서 사업도 챙기고, 골프도 치고 지인들과 교유하면서 그야말로 국제인으로서의 행복한 나날을 누려가고 있었다. 그러나 그런 여유 있는 사람들의 겨울나기가 내게는 그림의 떡일뿐 소시민에 어울리는 나 나름대로의 겨울 나기를 탐색하지 않으면 안 된다. 낮에는 이런 저런 일 때문에 바쁘다지만 5시도 되기전부터 어두워지는 저녁시간 이후도 문제이고, 주말과 휴일을 어찌 보낸단 말인가. 독서나 컴퓨터나 바둑만으로는 해결이 안 되고 건강을 해치기 또한 쉽다. 그렇다고 ‘OK Gift Shop’의 오너처럼 기후가 좋은 나라를 찾아 다니며 살 팔자와 능력이 안 되니 주어진 현실을 최대로 활용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뒷뜰이 약간 넓은 집으로 이사가서 간이 온실을 만들어 겨울동안 분재도 가꾸고, 가끔씩 가수 훈련도 하고, 한켠에 퍼팅 연습장도 만들고, 탁구대도 설치해서 주말이면 친구들 불러 시합도 하는등>. 정주영회장이 빈대에게서도 ‘머리 쓰는 법’을 배웠다는데 우리도 있는 머리, 없는 머리카락 짜내다 보면 분명‘겨울 퇴치 방법이 떠오르지 않겠는가. 그러다보면 아직 초기인 이민 사회의 이 혹독한 체감 겨울도 반드시 극복할만한 해법과 지구력이 생겨나리라고 본다.

2천년대초 모 은행 상위직 출신 K사장이 같이 식사하는 자리에서 “지금 퀸스트리트의 소매상들이 대부분 한국인들로 바뀌어 가고 있으며 몇 년 안에 반드시 이 거리를 장악하리라 예상 되는데 당신은 이런 현상에 대해 어찌 생각하는가”고 물었다. 솔직히 말해 그때 내 심정은 “이민자들이 물 스며들듯 소리 없이 현지화되어야지 특별히 눈에 띄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는 생각이었다. 키위들이 점심때 퀸스트리트에 나왔을 때 길가 상점의 대부분의 주인들이 한국인이고, 그 주변이 한국인들로 북적거리고, 다수의 아시안 유학생과 관광객들이 퀸스트리트를 활보하고 다닌다면 ‘마치 나라의 중심지가 아시안들에게 점렴당한 것 같은 느낌을 받을 수도 있지 않겠는가’하는 우려였다. 그런데 그런 대화들이 오고 간 지 불과 2년도 안돼 이민 정책이 급속도로 아시안들에게 불리하게 변화 되어 갔고 2006년 7월 현재 아시안 이민, 유학은 최악의 상태에 머물고 있는 현실이다. 이건희 회장이 ‘생각 좀하며 세상을 보자’는 에세이집에서 주장한 것처럼 Know-how보다 Know-where가 중요하게 여겨 진다. 그리고 그 둘보다 Know-when(때를 아는) 지혜가 더 필요할지도 모를 일이다.

어쨌거나 <교민경제 장기침체+이민,유학 대폭감소+몇십년만의 추위+월드컵16강 좌절+남북한의 불안한 정국>으로 이어지는 갖가지 악재는 이 겨울을 마냥 길게만 느껴지게 한다. 그러나 겨울이 길면 봄이 특별히 따뜻하다고 하고, 터널에는 반드시 끝이 있다고도 한다. 우리는 한국인 특유의 ‘끈기와 의지’로 일상의 겨울을 이겨내야 하고 고추보다 매운 이민 초기의 겨울도 반드시 극복해야한다. 그래야 영원히 살아가야할 태평양 남단의 이 외딴 섬나라가 우리의 미래와 후손들에게 진정 “따뜻한 남쪽나라”가 될 수 있을 것이라 믿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