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깍. 열리는 암실의 문.
외면하고 싶은 현실은 때때로 순간을 아름답게 포착해내는 능력을 지니고 있다. 아름다운 포착은 시간을 초월한 채 머리 한 켠에 걸어지는 장면과도 같다. 생생한 기억이란 찰나의 익숙함이다. 시간이 지나 머릿속이 컴컴한 암실이 된다할지라도, 그 사진만큼은 몸에 익은 듯 쉽사리 찾아낼 수 있다. 내게 그러한 사진 중 하나. 채도가 약간 낮은 오후 무렵 이국의 파티. 연두색 잔디가 깔린 건조한 마당. 멋스럽기도 하고 촌스럽기도 한 파란 체크무늬 테이블보. 테이블 위에 올려진 생생한 미각의 욕구들.
하늘이 벗겨진 것 마냥 노을은 분출하고 나는 파티가 끝난 뒤의 하늘을 바라보았다. 나는 C에게 말했다.
그리 깊지도 않은 하루였는데, 나그네가 된 것 같아.
C는 동의도 부정도 하지 않은 채 자신이 쥔 술잔을 들어 당신의 눈 속에 노을을 투과시켜내고 있었다. 푸른 술에 투과된 벌건 노을이 C의 눈 아래에 조각처럼 머물렀다. 사람들은 비가 그친 뒤의 유리조각들처럼, 저마다 짝을 지어 파티 끝의 조그마한 반짝임을 두런두런 저녁의 하늘 위에 던져내고 있었다.
조금씩 부는 바람. C의 흔들리는 머리칼 사이사이로 아리게 쏟겨지는 노을을 보고 있자니 두 손을 얌전히 모으고 눈을 뜨고 선 채로 죽고 싶었다. 그런 갑작스럽고도, 심지어는 준비되어 있었던 것만 같은 간절함에도 C는 여전히 푸른 술만을 멀거니 보고 있었다. 어쩌면 C는 푸른색이 가진 불가능, 그런 것을 보는지도 몰랐다. 이 파티가 끝나면, 너는 남태평양으로 가는 밤의 비행기 안에서 싸구려 이코노미석에 피곤한 몸을 파묻은 채 노을처럼 그리고 영원처럼 이 곁으로부터 사라질 것이었다. 영원. 나는 우리를 의미하는 단어가 영원이 아님을 알고 있었다.
스위치라면 어떨까. 나는 스위치를 생각했다. 저녁과 낮의 경계를 시각이 관통하고 있는 이 순간에도, 스위치가 있을까. 누구나 자신만의 스위치들과 열선을 타고 들어가는 느낌들, 각자의 극성을 발할 수 있는 그런 것들을 쥐고 있다. 순간을 잡아낼 수 있는 스위치는 없는 걸까. 왜 인간관계에서는 스위치 같은 명료한 장치가 없는 걸까. 스위치가 있었다면 우린 조금 더 행복해질 수 있었을까.
이제는 보라색으로 숨을 죽여가는 빛 속의 C를, 나는 바라보았다. 테이블 주위의 두런거렸던 사람들은 페이드아웃이라도 된 양, 조금씩 어딘가로 사라져갔다. 손에 쥔 고운 모래들이 바람결에 부드럽게 낙하하듯이, 그렇게 하루의 끝에서 사람들은 도란도란 각자의 길로 떠났다.
테이블 위의 케이크 상자에는 케이크가 아닌 빛과 그림자만이 들어있었다. 과자들이 차곡차곡 이불처럼 개져있던 접시 위에는 이제 막 켜지기 시작한 가로등 불빛이 뚝뚝하고 묻어났다. 반들거리던 가축의 고기조각이 누워있던 커다란 쟁반 위에는 서늘한 공기만이 남았다. 사람들이 머나먼 기억처럼 앉아있던 낡은 소파 위에는 흐린 색 낙엽만이 바람결에 톡톡, 하고 조금씩 흔들리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C의 뒷모습에서 간절한 밤의 스위치를 찾고 있었다.
C가 허리를 숙여 마당 위에 들고 있던 잔을 내려놓았다. 그리고는 뒤로 돌아섰다. C는 나를 향해 두 팔을 벌렸다. 나는 C에게 다가갔다. 우리는 노을처럼, 서로를 꼭 안아주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C의 몸 속에선 공기를 가르는 비행기의 맹렬함도, 하루가 와인 잔의 얇은 모서리를 안타깝게 스치는 속삭임도 들리지 않았다. 다만, 서로가 서로의 스위치라는 것을 확인이라도 하듯, 애정 어린 침묵만이 파티의 갈무리 위에 빛처럼 흩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딸깍. 멀리서 암실의 스위치 소리가 들린다. 눈을 감고 있기에, 무슨 스위치인지 알 수는 없다. 무슨 스위치였는지 알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