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소개서

자기소개서

0 개 673 박건호
본의 아니게 대학원에 입학하려는 사람의 자기소개서를 도와주게 되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면, 대학원이 뭐하는 곳이었는지 헷갈릴 정도로 충격적인 초고를 이메일로 보내왔다. 나라고 글을 잘 쓰는 것은 아니지만, 이 정도는 아닐 거라고 생각하며 입 밖으로 욕을 한 바가지 쏟아내었다.

두 가지 문제가 있었다. 첫째는 수많은 비문들이었다. 퇴고작업 때 수정 하는 것을 감안하더라도 이것은 20대 대학졸업생의, 소위 지식인이자 갑이라고 자칭 타칭하는 의학 대학원에 들어가려는 사람의 글은 아니었다. 책이라고는 오직 지식전달만을 위한 전공서적(사실 전공서적은 비문이 정말 많다)만 봤을 법한 느낌의 글이랄까.
 
두 번째 문제는 제일 심각한 문제였다. 진심이 없다는 것이었다. 진심으로 대학원에 들어가고 싶은지조차 모를 정도로 글에 힘이 없었다. 글은 노래와 같다. 기술적으로 잘 부르는 노래는 아니더라도, 진심으로써 승부하는- 다소 거칠지만 벼려진 칼날같은 노래는 사람들에게 명곡으로 기억된다. 설령 명곡으로 기억되지 않더라도 진심을 전하려는 목소리에 사람들은 주목하게 된다.
 
즉 자기소개서는 일종의 가요오디션 프로그램이다. 심사위원들은 자신에게 들어온 수없이 많은 채널들을 계속해서 돌리고, 그 중 눈에 띄는 주목도를 가진 글에 눈길을 멈춘다. 그리고 그 글의 기술적인 여부를 떠나 진심이 느껴진다면 그것만으로도 잘 쓴 글이다. 천편일률적인 스펙들을 제하고는, 자기소개서는 시청률이 나오게 만드는 것 자체가 장땡인 것이다. 그리고 장땡 이후에 진심과 깊이, 흐름과 드라마를 첨가시키는 것이 자기소개서의 핵심이다.
 
그렇다면 왜 의대 대학원에 가려는 이 사람에게선 진심이 느껴지지 않았을까. 당연하다. 진심이 없기 때문이다. 본인은 안 그럴 수 있겠지만, 그 자기소개서에서의 그는 한평생을 타인이 정해놓은 레일 위에서 달려온 사람처럼 생각되었다. 자신의 과거에 아버지가 의사였다는 것을 적고, 그래서 나도 의사가 하고 싶다는 식의 이상한 논리는 나를 당황시켰고, 수의학과 졸업생이 왜 의대대학원을 지원하는지, “그 이유를 만들어달라”는 부탁은 나로 하여금 이 사람을 혐오하게 만들었다. 그 나이가 되도록 왜 의사가 되고 싶은지, 이유를 모른 채 지원하고- (물론 내가 도왔으니 합격은 기원한다) 이유를 모른 채 “갑” 이 되려는 이 해괴한 상황이 우스웠다. 그리고 수많은 갑들이 이유를 모른 채 갑이 되었으니, 현재 한국인의 시민의식은 뒤틀려있는 것이 당연하다는 생각이 들었기에 서글퍼졌다.
 
생각할 시간을 주지 않는 한국 사회가 무섭다. 이 사람에게도 “영어단어 하나라도 외울 시간에 너의 인생에 대해 생각할 시간을 가져라”라고 누군가가 말해주었다면, 자기소개서에서 “학창시절 반장 등 학급간부를 많이 해보았으니, 저는 리더십이 있습니다”라고 적는 일은 생기지 않았을 것이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결국 생각할 시간을 주지 않는 시대가 이상한 야망을 끊임없이 생산에 내는 셈이고, 부의 세습으로 귀결되는 이 사회는 개천의 용을 끊임없이 죽이고 있다. 그리고 제 역할을 하며 끊임없이 개천을 청소하고 그 생명력을 유지시키는 가재나 올챙이·개구리 같은 생명들의 가치를, 용들은 인정하지 않는다. 그들에게 개천은 그저 개천일뿐이다. 그래서 개구리가 용이 되고 싶어서 온갖 부패를 저지르는 사회가 바로 한국사회다.
 
자기소개서에서 한국사회를 목격한 지구 한 구석의 나는 더더욱 한국이 무서워졌다. 이런 자기소개서를 들고 와서 수정해달라는 것도 사실 너무 무서운 일이다. 포털사이트에 “자기소개서 대필”이라는 검색어를 쳐 넣어봤더니 수많은 사람들이 자기소개를 못해서인지 이미 이 종류의 업계들은 남의 인생을 팔아 성업 중이었다. 부끄럼없이 자신의 인생을 남에게 대필하고, 개처럼 “쓰고” 정승처럼 살려는 그들이 새로운 일자리 창출에 기여라도 해서 다행이었다. 심지어 당분간은 아마 자기 자신에 대한 고찰과 자신감부터 기를 수 있도록 정책을 수립할 수 있는 시간은, 높으신 분들께도 없을 것이라 예상된다.
 
내가 한국인이라는 사실이 무섭다. 이것은 슬픈 일이다. 너무 슬픈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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