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사람에게 화가 하면 관념적으로 먼저 떠올리는 것이 이해하기 어려운 추상개념의 천재나 기인의 이미지를 그려 낸다. 그것을 구체적으로 묘사하면 빵 모자를 쓴 허름하고 괴상한 복장에 자신을 파괴할 정도의 기벽과 강한 개성, 그리고 술과 담배에 절은 좋게 표현하면 낭만적이고 나쁘게 표현하면 퇴폐적이고 난해한 무절제 속에서 일상생활을 포기한 휘청거리는 삶을 연상해낸다.
그러한 보통사람들과는 틀린 그러한 모습이 왠지 화가답고 멋스러워 보이며 기벽이 강할수록 천재성이 비례한다는 선까지는 이해를 하지만, 화가는 비논리적이어야 하고 배가 고파야만 좋은 그림이 나온다는 말과 함께 내가 진짜 화가처럼 보인다는 말에는 맞장구를 쳐 줄 기분만은 아닌 것이 이는 나에게 대 놓고 무식하고 배고프다는 지독한 독설로 들릴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더욱이 그러한 무식하고 배고픈 것이 화가의 숙명이라는 운명론까지 곁들인 확신에 찬 판결에는 반생을 그림을 업으로 삼고 살아온 그림쟁이이자 세 딸의 아비인 나로서는 다리가 후들거리는 선고가 아닐 수 없다.
물론 이러한 화가에 대한 무시무시한 선입관이나 편견에서 오는 관념적 이미지를 전적으로 부정할 수만 없는 것이 미술은 지적이며 논리적인 여타학문의 접근방식과는 달리 감성의 상상력이나 창조력에 의존하는 표현방식이 강하기 때문이다.
이는 모든 예술에 있어서 제일 중요한 상상과 창조라는 자체가 기존관념의 틀에서 벗어난 사유의 자유에서 출발점을 찾아야 하기 때문에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사고를 버려야 좋은 작품이 나올 수 있다는 말로 바꾸어 표현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음악이나 문학 등 많은 유형의 예술 가운데 유독 화가만이 낭만적이고 퇴폐적인 모습으로 정착이 되었을까?
그 이유는 역사적으로 유럽 봉건주의 붕괴와 자본주의 발달로 인하여 미술이 그 기능성을 잃게 되는 분화과정에서 찾아볼 수가 있다.
이는 봉건주의 시대에 회화나 공예 등의 미술품은 창조를 중요시하는 예술작품이 아닌 군주나 영주들의 주문생산에 의한 장식품이나 실 생활품으로 기술과 기능으로 이해되던 것이(그래서 ART는 예술과 기술이라는 상반된 두 가지 의미로 해석이 된다) 봉건주의 붕괴로 인하여 경제적으로 자신들의 후원자를 잃었을 뿐만 아니라 미술의 기능적인 면을 잃게 됨에 따라 예술을 위한 미술 다시 말해 순수미술의 개념이 등장하게 된다. 이러한 자율화된 순수 예술가인 당시의 화가들은 과학이나 의학과 같은 여타 학문처럼 특정한 사회적 기능이 없었기에 자신들의 영역을 찾기 위한 방황하는 과정에서 일상적이고 실용적인 사회영역에서 벗어난 자신들만의 독특한 생활방식을 과승시켜 표현했던 것이다.
또한 자본주의라는 새로운 환경에서 자신과 자신에 작품의 특이성을 부각시켜 시장경제에서 자신의 작품이 선택되는 폭을 넓히기 위해 자신의 독자적 활동방식을 과장하여 표현하고 차별화 시켰으니 그것은 생존을 위한 한 방편이기도 했다.
더욱이 한국화가에 대한 그러한 시각은 조선왕조의 문치주의 사상에서 비롯된 사농공상이라는 사회계급 등분에서 기인된 시대적 산물로서 형성되기 시작한 것으로 보여 진다.
물론 서양화의 역사가 짧은 한국 화단이 유럽과 같은 미술사적 격변기를 겪지는 않았지만 1900년대 초반 우리나라에 서양화가 도입되어 정착되던 시기가 후기인상파와 에콜 드 파리파가 유럽에서 형성되던 시점으로 한국의 서양화가들의 설익은 자아표현의 생활 속에 동시대의 유럽화가들에 강렬한 주관의식의 침투로 인해 “현실에 구애되지 않는 생활과 낭만이 삶의 평형감각을 마비”시키고, 일본의 잔혹한 식민주의 정책과 해방 이후 좌우 사상의 혼돈과 동족상잔을 겪는 암울한 역사가 당시의 지성인으로 자처하던 화가들에게 자연스럽게 확신 없는 현실과 불투명한 미래에 대해 자학과 냉소적이며 전위적인 낭만주의자에 길을 걷기를 강요했는지도 모른다.
이러한 이유에서 과장되게 강조되다 보니 일반인들에게 화가는 기인이나 성격이상자 심하게는 정신병자로까지 인식되고 있지만 현실의 화가들이 모두 이와 같이 비논리적이며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기준에서 벗어난 감성만 끌어안고 사는 가난뱅이 기인들인 것만은 아니다.
모든 사회구조가 다변화되듯이 그림 역시 단순히 그린다는 개념에서 여러 가지로 세분화되어 철학자와 같은 지극히 논리적이고 지적인 이론을 배경으로 하는 이념미술을 비롯하여 과학자와 같은 엄밀하고 지적 훈련이 필요한 비디오 아트나 테크놀러지 아트처럼 다양한 접근방식과 작업스타일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혹자는 그림에는 박사과정이 없음을 들어 학문이라고 할 수가 없고 굳이 학문이라고 말한다면 여타학문에 하위개념에 설 수 밖에 없다고 하지만 미술학이 철학과 사회학. 미학 등 모든 학문의 총체적 개념 위에 서있음을 말하고 싶다.
그리고 한가지 더 첨언하고 싶은 것은 화가들이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기존의 틀을 깰 수 있다는 것은 이미 그러한 것을 인지하고 습득하고 있기에 가능하다는 것이다.
또한 나처럼 팔리지 않는 그림을 그리는 가난뱅이 화가도 있지만 반면에 경제적으로 윤택함을 누리는 화가의 수도 적지 않음을 말하고 싶은 것이 만일 피카소나 고호가 살아서 계속 작품활동을 하고 있다면 빌 게이츠를 세 배정도 능가하는 부자가 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여러 가지 이유에서 화가에 대한 편견을 버리고 화가의 본질과 정체성에 대해서 한 번 직시해보는 것도 좋을 성 싶다.
ⓒ 뉴질랜드 코리아포스트(http://www.koreapost.co.nz),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