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가 어디선가 얻어다가 내 집에 심어 주었던 치커리는 흔히 구할 수 있는 종이 아니었다. 쌉싸름한 뒷맛이 입 안에 강하게 남는 녀석이었는데, 나이를 먹으니까 쓴 맛, 아니 정확히는 쌉싸레한 맛에 매료되곤 한다. 인생의 쓴 맛을 아는 나이가 돼서인가? 그녀는 여름날에 가끔 우리 집에 들렀다. 그녀와 나는 치커리에 밥을 척 얹고 고추장을 발라 한 볼탱이씩 먹었다. 매콤한 고추장 때문에 입안이 마비된 듯 얼얼한 데 설상가상으로 뒷 맛이 마이신처럼 쓰다. '스---스---' 그녀와 나는 입을 벌려 입 안에 바람을 불어 넣으면서 또 치커리 몇 장을 추려 손에 올린다.
'시난고난한 인생의 맛이 이렇지 않더냐?'
무언의 눈빛으로 물으며 말없이 또 한 볼탱이 쌈을 입안에 넣곤 했다.
S의 집은 아파트여서 텃밭을 가꿀 수도 없는 터. 그녀의 꿈은 텃밭이 있는 집으로 이사 가는 것이었다. 어쨌든 당장은 사정이 안되어서 우리는 치커리 사수 작전에 나섰다.
“치커리 가지러 갈께. 밭을 만들었어.”
“오잉?”
“내 방뎅이만해.”
S의 남편이 나무를 자르고 못질을 해서 '방뎅이만한 텃밭'을 만들었단다.
나는 그녀의 작은 몸집과 방뎅이를 떠올리며 참 사랑스럽고 에로틱한 텃밭이 만들어졌다고 생각했다.
내 친구는 '방뎅이만한 텃밭'을 들고 봄을 캐러 왔다. 그 상자 안에 치커리가 몇 뿌리 입양되었다. 시간이 흐른 뒤, 녀석들이 잘 성장한 모습을 본다면 내 마음엔 유쾌한 웃음이 강물처럼 흐르리라.
스파이가 된 여인과 그녀의 목표물이 된 남자가 등장하는 이안 감독의 영화 색계(色戒)가 오버랩 되었다. 치아즈(탕웨이 분)는 이(양조위 분)에게서 6캐럿짜리 다이아몬드 반지를 선물 받는다. 일본의 앞잡이 노릇을 하고 있는 이선생을 암살할 계획을 가지고 있었던 치아즈. 보석상에서 이선생을 만나 반지를 끼워 본다.
"왜 내게 이런 6캐럿이나 되는 다이아몬드 반지를---?"
"나는 보석에는 관심 없소. 단지 반지를 낀 당신의 길고 가는 손가락을 보고 싶었을 뿐이요."
그 순간 치아즈는 "도망가요!"라고 외쳤고 이선생은 총알처럼 뛰쳐나간다. 아, 누군들 그런 상황에서 이선생을 살리고 싶지 않겠는가.
나는 친구의 '방뎅이만한 텃밭'에서 자라난 치커리를 따서 쌈을 싸먹는다거나 하는 일엔 별 관심이 없다. 조그만 나무 상자 텃밭과 검은 흙과 그 위에서 초록빛으로 자라나는 치커리, 정(情)이 거름이 되어 배려와 사랑과 위안과 감동이 짙푸르게 자라고 있음을 느끼면 그것으로 그만이다.
이십 오년만에 최고로 추웠다는 10월, 텃밭에 돋아났던 싹들은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놀이처럼 몰래몰래 자라났다. 심술궂은 비바람과 먹구름 앞에서는 꼼짝 않고 있다가 햇살이 빼꼼 얼굴을 내밀면 잎과 줄기를 불끈불끈 키워냈다.
분주한 식물들 만큼 내 몸과 마음도 바빠진다. 들깨 모종이 필요하다던 지인에게 전화도 해야 하고 K선생 집으로 우엉 모종도 얻으러 가야 한다. 지난 해 여름, K선생 집에 우연히 들렀다가 강된장에 우엉 잎 쌈을 먹었었다. 시골집 할머니 음식 같은 맛에 향수를 담뿍 느껴, 봄이 되면 그 우엉을 몇 뿌리 분양받기로 진작부터 약속한 터였다.
그 전에 나는 방뎅이만한 몇 개의 상자를 만들기로 했다.
이 박사가 이별 선물로 만들어 주고 간 부추 화분. 타인에 대한 배려심과 사랑이 지극했던 이선생의 마음이 초록 빛으로 징하게 피어오르고 있다. 부추 뿌리를 한쪽씩 떼어내어 박스 안에 옮겨 심는다.
"당신은 외롭지 않습니다. '사랑과 배려의 부추' 입니다."
깻잎 모종도 조심스레 박스에 옮긴다. 줄기가 가느다란 실 같아서 비실비실 넘어진다. 나는 흙을 '두껍이' 집처럼 두둑히 쌓아 줄기를 곧추 세운다. 이 연약한 애들이 가을이 지나면 나무처럼 굵어져서 버티기를 얼마나 잘하는지 초겨울이 되어 뽑아 내려 하다가 힘 싸움에 밀려서 내가 고꾸라지곤 하는 그 애들이다.
"좌절하지 마세요. '힘내라 깻잎' 입니다."
치커리도 한 두 뿌리 상자에 넣는다.
"인생의 참 맛은 쓴 맛입니다. '위로와 격려의 치커리' 입니다."
가끔씩 텃밭에 물을 뿌려 주듯 소나기가 지나가고 따뜻한 햇살로 온기를 더해주고 살랑살랑 기분 좋은 바람도 불어주는 11월, 나는 상자 속에 근사한 봄날을 담아 볼을 비벼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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