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무(無)의 나라
0 개
2,234
25/08/2009. 17:31
코리아포스트 (122.♡.157.136)
어느 날 거실에 걸려 있는 동그란 벽 시계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초침이 정확히 60번 움직이면 분침이 어김없이 1분을 가 줄까? 사실이었다. 그런데 초침은 약간 속임수를 썼다. 12부터 6까지 내려오는 바늘은 가벼운 기분으로 찰칵거리며 내려가는데, 30번이 아니라 28번이었다. 그러니까 4에서 5, 5에서 6 사이를 성큼성큼 내려온 것이다. 내려오는 길은 쉬우니까. 그리고 6에서 12까지 올라갈 때 초침은 왔던 길로 다시 찰칵 떨어지기도 하면서 힘들어 하다가 겨우겨우 12에 도달했다. 놀라운 것은 내려올 때 모자란 것과 올라갈 때 넘쳤던 것이 합해져서 딱 60이 된다는 것이다.
'그래, 사는 일도 올라갈 때는 힘들지. 내려갈 때는 쉬워도---. 그래도 똑같이 반반인 걸?'
어떤 날 게으름을 피울 때 시계는 긴 회초리를 들고 서 있는 훈육 선생처럼 엄숙히 경고하곤 했다.
'밥이나 먹고 사냐? 평생 사람 구실 못할 뇬!'
나는 시계를 보면서 여러가지 깨달음을 얻었던 것이다. 사는 일에 대한 철학적 명제는 물론, 생활의 균형을 잡아 주던 시계였다.
지금이 몇 시나 됐을까? 손목 시계나 휴대폰 없이 외출 했을 때, 혹은 시계를 들여다 볼 경황이 없을 때 당신은 우연히 눈에 띈 시계를 본적이 있는가? 뉴질랜드 공공장소에서는 좀처럼 시계를 발견할 수 없다. 모처럼 발견한 시계탑의 시계는 자고 있는 중. 이민 새내기 시절엔 시계가 없는 풍경이 참으로 낯설고 답답했다.
일주일에 한 두번, 나는 Food Town이나 Count Down, Pak'n save 등에서 식료품을 구입한다. 나는 그 곳에서 화장실을 본적이 없다. 별로 살 것이 없더라도 매장을 한 바퀴 돌아서 계산대로 와야 하므로 최소한 10분(경보 수준으로 걷는다면)은 걸린다. 아니, 나는 식품 매장에 가면 최소한 30분은 걸린다. 뭐가 들어 있나 읽어보고 세일 가격 비교해보고 그러느라고. 그 30분 사이에 나의 뱃속이 편안하다면 천만 다행인데, 만약 과민성 증세가 발작이라도 일으킨다면? 황송하게도 Royal Oak Pak'n Save 매장은 옆 쇼핑 센터로 5분 이상 걸어가면 화장실이 있다. 나는 그 곳에 화장실도 있고 손도 씻을 수 있다는 사실에 감격했다. 그런데 갑자기 배가 뒤틀리고, 구토가 난다면 5분 이상 걸어갈 수 있을까? 매장 한 구석에 화장실을 마련해 놓으면 좋으련만, 무슨 피치못할 사정이라도 있는 것일까, 키위들의 뱃속은 모두 건강하고 편안해서일까? 반면, 한국 식품점은 작은 구멍가게라도 대부분 화장실이 있다. 2007년부터 추진되고 있는 서울시의 '여행(女幸) 프로젝트'의 5대 사업 중 하나도 '여성이 행복한 넉넉한 화장실'이다. 왜일까? 화장실은 더 이상 배설만을 위한 장소가 아니다. 물론 일차 목적은 '비움'이지만, 데이트 전에 화장도 고치고 쇼핑 중 잠깐 쉬기도 하고, 아기 기저귀도 갈아주고, 비우면서 걱정거리도 날려 보내는 해우소(解憂所)로서 중요한 것이다.
6년 전쯤, Penrose AA 센터에 운전 면허 시험을 보러 갔다. 시험에 몇 번 떨어지고 긴장했던 터라 화장실이 가고 싶었는데, 화장실이 없었다. 직원용 화장실이 안 쪽에 있었는지 모르겠는데, 화장실 좀 이용하겠다고 하면 너무 이상하게 보는 통에(그네들은 이슬을 먹고 똥을 안 싼다) 나는 그냥 참고 시험을 봤고 그런 저런 이유로 다시 떨어졌다. 지금은 화장실이 마련되었는지 모르겠다. 나는 이 문제로 지인과 진지하게 토론을 했는데, 지인 왈
“집에서 다 보고 오란 얘기지.”
“그게 자기 의지대로 되는 거야?”
“얘네들은 되나부지 뭐.”
화장품이 똑 떨어져서, 있어야 할 건 다 없고, 없어야 할 것도 없는 말만 백화점인 곳에 갔을 때 나는 정말 섭섭했다. 샘플을 한 개도 안주는 거다. 한국에선 로션 하나만 사도 샘플을 한 보따리 챙겨 준다. 이것도 써보시고 저것도 써보시고, 맛사지도 받으러 오시고 --. 언젠가는 내가 살던 아파트 관리실 앞에 C화장품 샘플이 가득 놓여 있었다. 그런 판촉행사 덕에 그 회사는 한국 굴지의 화장품 회사가 되었다.
뉴질랜드에서도 샘플 많이 주고 맛사지도 해주는 서비스는 한국인 화장품 숍이 유일하다. 나는 한국에서의 습성대로 화장품을 사면 당연히 뒤따르는 부가 서비스를 기대한다.
'자기가 필요해서 사는 데 무슨 서비스? 물량 갖춰 놓고 비싼 가게 세 내면서 상품 공급해주는 것도 어딘데---'.
키위들의 상술은 여기까지다. 어쩌다 샘플 하나 줄라치면 온갖 생색을 다 낸다.
사실 위의 세 가지 예는 살아가는 데 크게 문제가 되는 일은 아니다. 나는 일부러 아무 것도 아닌 일을 끄집어 냈다. 사소한 일에서 비롯된 마인드는 아주 중대한 일에도 그대로 반영되기 때문.
'유학(이민)을 온 것은 당신들의 필요에 의한 것. 더 이상 무슨 서비스?'
21C, 산업 경쟁력을 강화시키는 핵심 요소는 서비스 정신이다. 선진국의 지표와 '서비스 마인드'는 비례한다고 나는 감히 단언한다. 왜냐하면 서비스는 친절함이고 상대방을 극진히 대하는 마음이며, 나보다 더 타인을 생각하는 고귀한 정신이다.그러면서 자기 스스로는 겸허해지고 성숙한 인간으로 거듭나게 되는 최고의 가치이기 때문이다. 무형의 자산, 서비스 마인드로 윤택해진 사회는 저절로 행복이 깃들게 되지 않겠는가.
아, 세상의 모든 길들이 서비스 마인드로 통한다면 좋으련만---.
ⓒ 뉴질랜드 코리아포스트(http://www.koreapost.co.nz),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