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시청 전 한인회장의 훈훈한 유언장

유시청 전 한인회장의 훈훈한 유언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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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2일 KBS한민족의 프로그램인 <한민족 하나로>에 뉴질랜드 유시청 전 한인회장의 성공이야기 중 유언장에 관한 이야기가 방송되어 훈훈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우연한 기회에 자신의 인생 스토리를 쓴 것이 KBS한민족 프로그램에 채택되어 방송된 유언장의 이야기는 개인적 욕심의 사회풍토가 만연한 현대사회에 가슴에 와 닿는 이야기라고 하면서 채택의 이유를 달았다.

그는 꿈은 노력하는 자 만이 달성한다는 성공 수기에서 그동안 자신의 숨은 이야기를 밝혔으며, 특히 그의 유언장을 공개하였다.

그의 유언장에는 자식들에게는 $50,000씩만 물려 주기로 하고 사후에 뉴질랜드 오클랜드 대학 한국학과에 10만달러를 기증한다는 내용이 담겼으며, 욕심을 버리고 단지 자기가 속한 국가와 민족과 사회에 모든 구성단체에 하나의 주춧돌로서 그 역할을 다하고 자기가 받을 것을 도와준 사회를 위해서 환원하는 것이 진정한 꿈의 달성라고 말하면서 뉴질랜드에서 배운 것이 바로 '기부'라고 밝혔다.

그는 우리도 이제부터 누군가가 자신에게 해줄 것을 바라지 말고 누군가에게 자신이 해줄 수 있도록 인식을 바꾸어야 한다고 말하면서 이민의 성공은 자식이 성공해야 하고 자식의 성공은 홀로서기가 되어야 한다고 말하면서 그 뜻을 이해해준 아내와 자식들에게 고맙다고 밝혔다.

또한 지난 10월에 지급한 결식아동 지원금 500만원 또한 유언장의 일부분으로 방송에서 왜 500만원이 사후에 지급되지 않고 살아있을 때 기증되었는지 설명되어 있다.

필자는 방송을 들은 후 유시청 전 한인회장에게 전화를 해 방송에 나온 내용 잘 들었다고 하니 그는 쑥스러워 하면서 KBS 방송 기사건은 원래 왼손이 하는일을 오른손이 모르게 하라고 예수님께서 말을했지신문에 기사가 나가고 난 이후부터 계속해서 고마운 독지가가 나타나 배고픔에 굶주린 어린 아이들에게 아주 좋은 계기가 되었다고 하여 매년 성금을 낼때마다 교육청에서 언론에 내보내는것을 거절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그가 
한인회장을 하게된 동기에 대한 숨어있는 이야기도 꺼냈다.

한국에서 지난 30년간의 사업을 해 나오면서 한팔은 사업에,또 한팔은 봉사업무
에 똑 같이 헌신해 온 경험이 있었기에 2년간의 한인회장의 일은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였으며 한국에  사업할때도 (우유및 학교 급식 사업) 항상 전국 일등이였고 또 봉사업무( 울산 청년회의소이사,피플 투 피플이사및 회장)를 할때도 언제나 전국 최우수 회원 이였으며 심지어는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손녀가 총재로 있는 피플 투 피플 클럽 국제본부에서 주는 세계 지도자상도 받았으며 조직력을 잘 활용하는것이 자신의 장점이라고 말했다.

허지만 한인회장의 직을 수행하는 동안 목표한 많은것중 달성하지 못한것이 있었기에 지금도 안타깝지만 그것은 후임회장이 충분히 할수 있다고 생각한다고 하면서 그래도 지난 2년간 다 내려놓고 풀타임으로 한인회장직을 내 전업이다고 생각하고 최선을 다해 열심히 한 결과 이제는 전 교민이 한인회를 사랑하게 되었고 또 교민사회가 한인회를 명실상부한 중심단체로 인정해준것이 그나마 노력한 보람이라고 말했다.


그는 또 이제 비록 한인회장직은 내려왔지만 로타리 회원과 평통
위원으로서 또 전직 한인회장으로서 교민사회에 헌신할수 있는 기회를 찾아서 기력이 남아있는 동안 민족을 위해서 한 몸을 바칠 것이라고 말하면서 전화를 내려 놓았다.


다음은 유시청 전 한인회장의 <꿈은 노력하는 자 만이 달성한다>라는 성공 수기의 전문이다.



<꿈은 노력하는 자 만이 달성한다.>

영사관에 서류 발급 때문에 갔더니 창구 앞에 이민 성공 수기 모집이 있기에 “나는 성공한 것도 없고 해서 나하고는 상관없네.”

하니까 직원이 실패한 것도 된다고 했다. 하지만 이때까지 실패한 적도 없었고 가만히 생각해보니 내 6살 시절의 꾸었던 꿈이 이루어졌으니
이것도 성공이 아니었나 싶어서 한번 써본다. 내 인생 스토리를!

때는 1955년 동족 상잔의 비극인 6.25 전쟁이 휴전으로 끝난 직후였다. 곳은 경주의 어느 동네 앞 신작로. 뽀얀 먼지를 뒤집어 쓰며 한 소년이 미군 지엠시 트럭 뒤를 달리면서 연신 “헬로우”를 외치고 있다. 타고 있던 미군이 헬로우 소리에 기분 좋아서 던지는 시레이션 속의 동그란 초코렛을 받아먹기 위해서 죽을 힘을 다해 달린다. 그나마 재수가 좋은 날은 수확이 있지만, 재수 없는 날은 빈 탕이 되기 일수다. 유달리 키가 작은 그 소년은 남에게 뺏기기가 일수다. 허탕 친 날은 눈앞이 시려와서 하늘을 본다. 미군 제트기가 흰구름을 길게 내뿜으며 창공은 가로지르고 날아 간다. 그때 소년의 꿈은 초코렛을 마음껏 먹고 비행기를 타보는 것, 그것이 그의 꿈이었었다.

오늘도 오클랜드 공항의 입국 세관 창구는 한국에서 온 많은 관광객과 교민들의 음식보따리 검사에 복잡하다. 그때 옆에 서 있는 오십 중반이 넘은 머리가 조금씩 벗겨진 반백의 신사가 보인다. 오늘로써 비행기를 1백 2만 마일 이나 탔다. 자그마치 한국과 오클랜드를 11년째 약 100번을 왕복했다. 가족은 오클랜드에 두고 한국에서 하던 사업을 마무리 중에 있는 그는 이제 자신이 조금 늙어간다는 것을 깨닫고 있다. 지난 55년의 세월이 주마등처럼 지나 가면서 5살 때 가졌던 그 꿈은 이제는 달성했다고 생각하나? 아니면 아직도 미완성인가? 그 실컷 먹고 싶다던 초코렛, 실컷 타보고 싶다던 비행기. 이젠 다 달성했지만 그가 가족들에게 약속한 유언장 속의 사항이 아직도 미 집행된 것이 있기에 미완성의 성공이라고 할까?

초코렛을 먹고 비행기 타보기가 꿈이었던 그 소년의 일생은 참으로 기구했다. 양반 집 가정에 태어났지만 가정의 대들보이셨던 부친이 사업의 도산으로 병환에 드셔서 그만 10살 때 돌아가셨고 그때 그의 어머니는 남편의 죽음을 앞두고 막내 아들을 낳으셨다. 위로는 누나 둘과 아래로 남동생 셋을 둔 맏아들이었지만 그 소년은 그때부터 어린나이에도 집안의 가난함을 떨쳐보려고 학업보다는 돈 버는 것이 가정에 보탬이 될까 싶어서 가출을 시도하는 방랑아 였다.

그의 남동생도 6살 되던 해 (아버지가 돌아가시던 그 해)의 봄 아버지가 그때 사업차 계시던 포항에 간다며 집을 나간 후 여태껏 소식이 없다. 그러니 온 집안의 책임은 10살 밖에 안 된 그 어린 소년에게 집중되었다. 아버지의 3년상을 치르고 난후부터 그 소년은 경제적인 문제로 방황하기 시작했고 어머니와 가족들은 그 소년으로 인해서 많은 고통을 겪었다. 후일 들은 바에 의하면 어머니가 점을 보는 사람에게 가서 물으니 “이 아이의 사주팔자는 어머니와 같이 살 팔자가 못 되고, 이역 만리 집 밖에 나가서 살 팔자입니다.” 라고 하드란다..

그로부터 십 여년간 가출과 복학을 거듭하던 끝에 군대에 갔으며, 갔다 온 후 드디어 집에서 정착하기 시작했다. 아들이 이제 집에 있게 되자 그의 어머니는 오랜 고생으로 인한 병환으로 쓰러지셨고, 3년 뒤에 타계하셨다.. 그 사랑하던 아들의 성공도 지켜보지 못하시고… 그 후 그는 택시 운전, 가전 대리점 기타 여러 사업을 하다가 1978년도에 한 때 학교 생활을 했던 울산으로 갔다. 거기서 대메이커의 음료 대리점을 하면서 가출해서 쌓았던 많은 시련을 경험한 덕분에 언제나 전국 1등을 독차지하였다.

처음 만난 타인들과 부디 치며 살아간 그 숱한 인내가 바로 그의 사업의 교과서였으며 늦게 트인 배움의 의욕이 그로 하여금 일본어 일급 자격 획득 기타 많은 경영 서적을 읽게 하여 지혜의 벽을 두껍게 쌓아가는 계기가 되었다. 그것은 결국 결코 포기하지 않던 어머니의 자식에 대한 집념을 그 아들도 똑같이 이어받았던 것이다.

그로부터 10여년 그는 하루 4,5시간의 잠만 자고 불철주야로 사업에 노력한 결과 전국 대리점 중 항상 최우수 대리점으로 발전해나갔다. 가출과 전학을 밥 먹듯이 반복했던 그 쓰라린 과거가 그에게는 인생의 커다란 경험을 하게 했고 또 가출해서 많은 이들로부터 받았던 도움은 이제 그가 성공해서 다시 사회로 돌려드리기 시작했다.

1980년 울산 청년회의소에 입회해서 10년간 그가 배웠던 일본어로 한일 양국간의 민간 교류에 일익을 담당했으며 또한 청년회의소의 많은 봉사 활동에 단 한번도 빠지지 않는 열성을 보였다. 또한 같은 울산의 국제 민간 단체인 PTP(피플 투 피플)에도 1981년 가입해서 25년간 이사 국장 회장을 거치면서 특히 그의 일본어 실력으로 한일 양국의 청소년 교환 민박 프로그램을 만들이 양쪽 나라에서 약 1000명의 학생들이 서로 방문해서 민박을 하면서 양국의 청소년간의 우호증진에 도움이 되게 했다. 그 공로로 그가 회장 재임시인 지난 2000년 10월 홍콩에서 개최되는 PTP 세계 대회에서 노벨 평화상 수상자인 남아프리카의 투투 대주교가 지켜보는 가운데 세계 최고 클럽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하지만 모든 것이 강하면 부러지는 법이 이 세상 철칙인데 그도 너무 열성적으로 한 나머지 주위의 숱한 사람으로부터 많은 소문에 시달리게 되었다. 특히 한국의 경제가 7-80년대만 해도 그렇게 썩 좋은 편은 아닌데, 불과 30여세의 나이에 돈 많은 부자의 아들이나 입회한다는 청년 회의소와 PTP 클럽에 젊고 가난한 사업가가 입회하여 활동하다 보니 주위의 많은 사람으로부터 혹시 간첩이 아닌가 하고 의심하게 되었다. 그 당시 간첩 식별 요령 주 몇 개 항이 그의 실생활과 너무 닮아 있었다.

1. 넉넉하지도 못하면서 이웃과 사회에 너무 선심을 쓴다..
2. 젊은 나이인데도 너무 일본어를 잘한다. (그는 어머니의 사망 직후 어머니의 집념에 상응하기 위해서 학원에서 6개월간 수료 후 거의 일본인 수준의 회화가 가능하도록 공부했음.)
3. 메모를 많이 한다. (일본어를 잘 하다 보니 일본인의 메모 습성을 배웠으며 지금도 메모하는 습관이 그대로 남아 있어 약속을 어기는 경우는 100분의 1도 허락치 않음)
등으로 주위의 많은 사람으로부터 간첩의심을 사서 그 당시 중앙 정보부 직원으로부터 조사를 받고 오해가 풀렸으나 그때 서슬이 시퍼랬던 보안사에 가서는 1주일간이나 조사를 받았으나 무혐의로 풀려났으니 그의 봉사 정신은 안기부도, 보안사도 막을 길이 없었다.

이웃에서 보기에는 성공한 그였지만 그는 만족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평소 어린 소년 시절부터 동경해오던 그 꿈이 아직도 그의 머리 속에서 꿈틀거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하나 걸림들이 된 것이 그가 그의 어머니로부터 배운 절약 정신은 도저히 그 당시의 사회 관습과는 맞지 않은 것이었었다. 어떤 물건이던지 한번사면 깨지거나 고장이 나지 않으면 절대 버리지 않고 끝까지 써야 직성이 풀리는 그 였기에 지금도 25년 넘게 차고 다니는 시계며 모든 것이 초 절약적인 그가 한국의 그 당시 정서와는 맞지 않는 것이었다. 지난 30년간 승용차는 언제나 중고차를 구매했으며 (딱 한 번 이곳 뉴질랜드에 처음 이민 와서 가족을 두고 다시 한국에 나갈 때 걱정되어서 새 차를 샀던 경우를 제외), 심지어 신문지 속의 광고 종이도 언제나 그의 메모지 대용이었으며 또한 자동차의 기름 역시 절약키 위하여 평생동안 소위 FREE 쓰는 것 (기어를 내리막 길에서나 신호등 앞에서는 중립으로 넣고 가는 운전 행위) 은 지금도 계속하고 있다.


일본을 너무 자주 다니다 보니 한 눈 팔지 않고 오직 한가지 사업에만 평생 몰두하는 일본인의 성격을 배워서 사업만 계속하던 중 어릴 적 가졌던 꿈을 실현시키고 싶은 시도가 바로
뉴질랜드의 이민이었다. 그 이민의 계기도 우연치 않은 하나의 사건이 있었다.

큰아들의 운동화 사건이다. 그는 자식들에게 운동화를 신을 때 비가 오면 안 새는 것, 비가 안 오면 밑창이 떨어진 것을 신으라고 엄명을 해 놓았는데, 하루는 학교 수업을 마치고 집으로 들어오는 큰아들이 날씨가 맑은데 새 운동화를 신고 들어오는 것을 보았다. 그래서 다짜고짜 왜 아버지와의 약속을 어기느냐고 하면서 그 자리에서 옷 벗고 동네 한 바퀴 돌아오라는 벌을 주었다. 그런데 큰아들이 울면서 말하길 “내가 학교에서 선도부 일도 보고 아버지가 학교 육성회 총무인데 오늘이 교문 앞 선도를 맡은 날인데 애들이 내 운동화를 보고 자꾸 놀려서 체면이 안 서서 새 것을 신고 갔다”고 하였다. 그것을 듣고 나는 ‘아! 이 나라는 나 혼자 근면 검소하게 산다고 다 해결이 되는 사회 풍토는 아니구나’ 하고 느낀 후 내 적성에 맞는 나라를 찾기 시작했고 그것이 뉴질랜드였다.

뉴질랜드

이민을 계획하고 나서 우선 철저한 준비작업을 했다. 1988년 5월 1차 현지 답사를 했고, 1990년 12월 30일 2차 방문을 하여서 일단 영주권을 받고 준비 미흡으로 한국으로 돌아갔다. 그로부터 4년 후인 1994년 큰 딸이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울산 현지의 햄버거 식당에서 6개월간 트레이닝 시킨 후 7월 경 가족 중 맨 먼저 오클랜드에 도착 시켜 컬리지에 편입 시켜서 이민 준비를 본격으로 했다.

그 해 12월초 모든 이삿짐을 정리하여 서울에 있는 해외 이주 이삿짐 전문 회사에 의뢰하여 이삿짐을 컨테이너에 실어 보냈는데 사고가 생겼다. 컨테이너가 태평양 한가운데 왔는데 서울에 있던 그 회사가 부도가 났다고 했다. 그래서 어처구니 없게도 첫 시작부터 어려움을 겪었지만 그 알선회사의 사장부인이 임신 중이고 고생하고 있기에 하는 수 없이 다시 운임을 송금시켜서 그 문제를 해결했다.

드디어 뉴질랜드에 정착했다. 큰딸이 먼저 6개월간의 트레이닝을 거쳤기 때문에 조금은 쉬웠고 주위의 많은 분들로부터 도움을 받아서 큰 어려움은 없었다. 그래도 혹시 도움이 필요하신 분이 계실까 바 지난 10년간의 자식 교육, 직업, 기타에 대해서 몇자 적어본다.

우선 자동차 사는 것이 첫번째였고, 두 번째가 집 구하는 것이었다. 자동차는 내 자신이 오클랜드에 당분간 함께 있을 수가 없어 생애 최초로 5인 승 왜건을 샀다. 가족이 6명이라서 왜건 화물 칸에 막내를 태울 욕심이었다. 그리고 집은 자녀들이 반듯이 학교에서 걸어 다닐 수 있는 곳이 첫번째 조건이었고, 쇼핑 몰에서 5분 이내의 거리, 길에서 위로 올라가는 위치와 햇볕이 잘 드는 북향 등을 고려해서 매수한 후 지금까지 살고 잇다.

그리고 자녀 교육문제 건인데, 큰딸과 둘째 딸은 이미 한국에서 고등학교 졸업 혹은 재학 중에 와서 웨스트레이크 고등학교에 편입시켜 무사히 오클랜드 대학까지 나온 후 큰딸은 현지 은행의 과장으로 근무 중에 있으며 결혼하여 외손주의 기쁨도 안겨주었다. 그리고 둘째 딸도 오클랜드 대학을 나와서 지금은 유학원을 하면서 회계사 과정을 공부하고 있다. 원래 큰딸은 한국의 울산에서도 명문 학교인 울산여고에서 공부를 잘하였고 둘째 딸도 한국에서 고등학교 입학을 수석으로 입학하는 등 별 어려움 없었기에 이곳에서도 적응을 잘해주었다. 그런데 문제는 아들들이었다.

딸 둘 밑으로 두 아들이 있는데 두 아들은 날 닮아서 그런지 공부보다는 사회생활에 더 취미가 있는 것 같았다. 이곳에 도착 당시 각 칼리지 2, 3학년이었는데 2년이 지난 후 그간의 영어 실력을 테스트 해보려고 근처 자동차 수리업소에 같이 갔더니 통역하는 영어 실력이 시원찮았다. 그래서 서둘러 집으로 와서 문제점을 분석해보니 학교에 가면 한국 학생도 많고 또 남자애들이라서 타민족 학생들과의 마찰도 생기고 하여서 사실 실력이 나쁘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일단 대책을 세워보기로 했다. 큰딸에게 북섬에 있는 남자 고등학교 중 반드시 집에서 3시간 이상 떨어져 있는 학교 중 기숙사가 있고, 한국 학생이 없으며 총학생수가 500명 내외의 학교를 찾아서 7개의 학교 교장과 먼저 면담 약속을 한 후 큰딸과 우리 부부가 동행하여 먼 1500Km의 학교 탐방 대장정을 시작했다.

북섬의 아래쪽 큰 도시로 다 둘러 보았지만 그래도 시골의 인심이나 학교 시설 및 교직원들의 분위기가 가장 좋았던 T도시의 한 학교로 결정을 하고 아들 둘은 그곳에서 2년간 수학한 후 오클랜드의 학교로 다시 전학 시켰다. (그 후 T 도시의 그 학교에 많은 교민 자녀를 보냈음)

T 도시에서 큰아들이 홈스테이 하고 있는 키위집이 있었는데 그 집은 주위에 목장을 하고 있었다. 가끔 그 집을 방문하면 그 목장주인은 자기의 조모가 200년 전 영국으로부터 뉴질랜드로 이주 왔다는 그 당시의 기록과 책자도 보여주었다. 그래서 한번은 마침 대한항공 기내 책자에서 본인의 고향인 안동 하회마을을 소개한 내용이 있기에 들고 가서 보여주었더니 깜짝 놀라면서 그날 식사대접을 받고 그 집을 나올 때는 아일랜드 민속악기인 백 파이프를 들고 나와서 전가족이 환송식까지 성대하게 해주는 대접을 받았는데 역시 영국인은 가문의 역사를 대단히 중요하게 생각하는 민족이라는 것을 느꼈고, 우리가 키위들과 만날 때도 꼭 집안 족보가 있으면 보여주는 것도 우리를 인정 받게 하는 한 계기가 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본인은 지난 10여년간 한국과 뉴질랜드를 오가면서 한국에서 사업을 했지만 아내는 혼자서 미용실을 하면서 전가족을 돌보았다. 그래서 항상 미안함을 금할 수 없었다. 그 가운데서도 또 다니는 교회에서는 선교회 간부도 하고 구역장도 하면서 교회 생활에도 최선을 다하지만 부창부수라고 오클랜드 한국인 여성회에서도 간부를 맡아서 사회 봉사에 최선을 다하는 것을 보면 부부는 오래 살면 닮는다는 말이 사실인 것 같다.

내 조국은 한국이고 현재 나와 내 후손이 계속 살아가야 할 나라는 이곳 뉴질랜드이다. 그래서 이곳 뉴질랜드는 고국 못 지 않게 중요하다.
그래서 일년 중 반은 한국에서 살고 반은 이곳 오클랜드에서 살았지만, 한국에 거주하는 동안에도 계속해서 J.C와 P.T.P 두 단체에서 계속 봉사 생활을 했고 이 곳 뉴질랜드에 와서도 공동체 참여 의식은 전혀 변함이 없었다.

도착 이듬해부터 내기 시작한 한인회 회비는 한번도 빠짐이 없고 뉴질랜드 체류 중 한인회 총회가 열리면 꼭 참석해야 직성이 풀렸다. 그러면서도 이 곳 내가 살아가며 내 후손이 살아가야 할 뉴질랜드에 무언가 봉사하고 싶어서 시작한 헌혈이 벌써 17번째나 되었다.
하지만 내 조국도 중요하기에 3개월 간격으로 교대로 한국과 뉴질랜드에서 헌혈을 하고 있다. 그래도 또 마음이 허전하였다. 그래서 물어 물어 찾아간 곳이 타카푸나 라이언스 클럽이었다. 비록 영어로 불편한 두 시간을 꾹 참고 기다려야 하지만 이곳 키위들이 아시안도 봉사 활동에 열성이고 같이 살아가야 할 민족의 자격이 있다 라고 보이고 싶어서 한 것이 벌써 2년째이다. 그러던 중 지난 9월에 드디어 희소식이 보였다. 우리 한국사람 끼리 하는 노스쇼어 로터리 클럽이 결성되었다 하기에 입회하여 창립식부터 이제까지 참여하고 있다.

가족이나 친구들이 보면 꼭 무슨 병적인 사람같이 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에게는 원칙이 있다. “인간은 결국은 늙게 되고 죽으며 빈손으로 돌아간다. 그리고 자식에게 유산을 물려주면 반드시 망한다.”라는 철칙을 믿는다. 그래서 그 동안 살아 오면서 알게 모르게 많은 사람으로부터 도움을 받아서 오늘의 내가 있을 수 있으며 (도움을 주신 그분들에게 직접은 아니라도) 사회를 위해서 봉사한다면 그 은혜를 갚는 길이라고 생각한다.

이제 마지막으로 유언장 얘기를 해야겠다.

이곳 뉴질랜드에서는 국민들 대다수가 유언장을 미리 작성한다고 자식들이 자주 얘기했다. 그리고 아버지도 비행기를 자주 타시니까 미리 작성해 놓으시는 것이 좋겠다고 전 가족이 다들 얘기해서 하는 수 없이 집사람과 변호사 사무실에 가서 작성했다. 그런데 그 내용은 사전에 자식들과 합의한 내용이 있었다. 이곳 뉴질랜드에 이민 와서 약 2년이 지났을 때 한국 신문에 난 유한양행을 창업하신 유일한 박사의 유언내용이 너무 가슴에 와 닿았다.

유일한 박사는 무남독녀인 외동딸에게 US 1만 달러만 유산으로 남겼다고 해서 국내에서 화제가 되었다는 그 기사를 읽고 나도 전 가족을 모아서 유산에 관한 얘기를 하면서 아버지도 그렇게 하겠다고 하니 아이들 전부다 찬성했다. 그런데 단 조건이 있었다. US 달러로 1만 불과 결혼식 비용이었다. 그래서 그 당시 환율이 약 2:1 이라서 유산 2만불, 결혼식 비용 기타 전부 3만불, 그래서 총 뉴질랜드 5만 불을 주기로 자식들과 합의했다. 그런데 사실 우리집은 고등학교 졸업한 이후에도 용돈을 전혀 지급치 않으며 본인이 사용할 5만불 중에 자동차나 기타 사업 자금을 누구도 앞당겨 사용할 수 있도록 했다. 그러던 중 큰 딸이 결혼 후에 집을 샀다. 그래서 부부가 다 직장에 다니지만 집 월부금 내기가 어렵게 보이기에 조금 지원해줄까 하니 큰딸도 거절하고 다른 자식들도 약속 위반이라고 펄쩍 뛰었다. 그 순간 아! 내가 원칙을 지켜야 우리 자식이 바로 선다.

그런데 그 유언장에도 문제가 있었다. 유언장 내용 중 첫번째가 사후에 한국의 교육청에 점심을 못 먹는 결식 아동 지원금으로 5000만원 지급하고 두 번째로 제 2의 조국인 이곳 뉴질랜드의 오클랜드 대학 한국학과에 10만 달러를 지급하라는 내용이 있었는데 지난 10월 울산의 전국 체전 기간 중 내가 다니던 교회의 목사님 말씀이 사후에 하는 약속은 지키지 못할 확률이 많다고 말씀하시는 것을 들었다.

신혼부부가 평생을 해로하자고 굳은 약속을 했건만 쓰나미에 휩쓸러 사망하고 난 뒤 무엇을 지킬 것이며 그 어떤 약속이든지 내가 살아 있을 때 그것을 지키는 것이 우선이라고 설교하시기에 꼭 그 말씀이 나에게 하시는 것 같아서 마음에 죄책감이 들었다. 그래서 그 이튿날 당장 뉴질랜드에 전화해서 아내와 자식들에게 우리가 불경기로 어려워도 이때까지 건강하게 살 수 있도록 허락하여 주시고 다들 자기 직장을 갖고 열심이 살고 있어 밥 굶을 염려는 없을 것이니 전번에 쓴 유언장의 그 내용을 실행에 옮기자고 하니 아내와 자식들이 다 찬성해 주어서 그 다음 날 교육청에 연락해서 전국 체전 기간에 해외 각국 교민들이 많이 와서 신세를 지는데 뉴질랜드 교민의 한 사람으로서 5000 만원을 결식 아동 지원금으로 기증할 테니 그 돈의 이자로 결식 아동을 도와주라고 했다.

그 연락한 다음 날 교육청 담당자에게서 연락이 왔는데 우선 지금이 전국 체전 기간이라서 바쁘니 체전이 끝난 10월 27일 전달식을 갖자고 했고, 5000만원의 이자가 연 150만원도 안 되니 기증자가 500만원씩 10년만 기증을 하면 좋겠다고 해서 10월 27일 그 첫 회분인 500만원을 기증했다. 이제 그 꿈이 조금씩 이루어져가고 있다.

유언장의 1,2항 내용이 다 완성되면 내 꿈도 달성되리라 본다. 진정한 꿈을 이루는 것은 이 세상 진주를 다 주을 수 없고, 바닷물의 물을 아무리 퍼도 다 퍼올릴 수 없듯이 욕심을 버리고 단지 자기가 속한 국가와 민족과 사회의 모든 구성 단체에 하나의 주춧돌로써 그 역할을 다하고 자기가 받은 것을 도와주신 사회를 위해서 환원시키는 것이 진정한 꿈의 달성이 아니겠는가?

이곳 뉴질랜드에 이민 와서 가장 많이 배운 것은 기부이다. 오클랜드 도처의 공원들은 거의 다 개인이 기부한 것으로, 바로 뉴질랜드인들은 그렇게 해서 이곳을 살기 좋은 나라로 만든 것이었다. 우리도 이제부터 누군가가 자신에게 해줄 것을 바라지 말고 누군가에게 자신이 해줄 수 있도록 인식이 180도 바꿔야 한다.

이민의 성공은 자식이 성공해야 하고, 자식의 성공은 홀로서기가 되어야 한다. 때로는 자식을 과외지도 시켜서 공부를 하기 쉽도록 해 주고 싶었고, 좋은 옷도 입히고 싶었고, 용돈 궁한 것을 보고 주고 싶었지만 꾹 참았던 것이 오늘 날 자식들이 스스로 살아가는 것에 큰 도움이 되었고 좋은 방법이 되었다는 것을 다시 한 번 일깨워 주었다.

끝으로 뉴질랜드에서 지난 11년간 묵묵히 가정을 혼자 도맡아서 지키며 본인 사업도 열심이 한 아내에게 이글로서 감사의 마음을 표하며 아버지의 그 뜻에 따라서 늘 협조해 준 자식들과 오클랜드 정착에 도움을 주신 많은 분들과 친구들에게도 감사의 뜻을 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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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각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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