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 공부를 위한 한국어 죽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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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4/2009. 16:28
코리아포스트 (122.♡.147.230)
인간은 언어를 통해 사고를 발달시켜 나간다. 우리의 뇌 속에 있는 대부분의 지식은 교육을 통해, 독서를 통해, 즉, 언어를 통한 간접 경험으로 축적된 것이다. 물론 여행이나 살아가는 과정의 직접 경험을 통해 지식과 지혜를 얻기도 하지만, 이 과정에서도 사람들을 언어를 사용하여 자신의 머리 속에 습득된 지식과 경험을 정리하고 축적 해 간다.
또한 직접 경험의 경우에도 한 사물이나 현상에 대한 다양한 단어를 알고 있는 사람과 하나의 단어만을 알고 있는 사람들 사이에는 그 경험의 폭과 깊이가 다르게 다가온다. 즉 많은 어휘를 미리 습득한 사람이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더 많은걸 느낄 수 있다.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아름다운 세상을 내가 아는 만큼만 느끼고 누리며 살아갈 수 있다. 예를 들면 눈(snow)이 흔한 한국같은 북반구 나라에서는 함박눈, 싸락눈, 진눈깨비 등 눈을 표현하는 다양한 단어들이 있다. 그러나 눈이 흔하지 않은 멕시코에서는 눈을 표현하는 단어가 단 한 개 밖에 없다. 결국 한국사람들은 함박눈이 올 때의 느낌과 진눈깨비가 올 때의 느낌이 언어를 통해 확연히 구별되지만 멕시코 사람 들은 모두 '눈이 온다'는 한 가지 현상으로만 이해될 것이다.
필자는 뉴질랜드에서 영어를 가르치면서 영어 능력에 있어서 심각한 지체 현상을 보이는 학생들을 많이 만났다. 그런데 그런 학생들의 공통점은 영어만이 아니라, 뉴질랜드에 머문 시간을 감안한다 하더라도, 한국어 능력이 너무 많이 떨어져 있었고 사고 능력까지도 동반 지체되어 있었다. 필자가 만난 한 학생은 이민와서 부모님께서 오클랜드의 외곽 지역에 한국 사람들이 많지 않은 곳에 정착을 하셨다. 학교에서 주로 키위 친구들과 지내다 보니 말하는 영어는 그 학교의 어느 한국 학생들보다 빠르게 늘었고 학교의 영어 선생님도 그 학생이 영어를 잘한 다고 칭찬했었다. 그러나 읽고 쓰는 영어능력(written English)이 부족했던 그 학생은 form 5에 올라가면서부터 문제가 생겼 다. 대학 준비과정에서 그 학생은 '영어 실력 부족'으로 어려 움을 겪게 되었던 것이다. 이 학생의 경우에는 영어의 언어 능력뿐만 아니라 한국어의 언어 능력도 아주 낮은 수준에 머무르고 있어서 두 언어 중 어느 한쪽으로도 '공부할 수 있는 언어능력'이 형성되어 있지 않은 상태였다. 참고적으로 이민 오기 전 초등학교 시절 이 학생은 그 또래의 아이들보다 말을 잘하고 많이 하는 학생이었다. 이런 경우를 감소적 이중언어자(subtractive bilingual)라고 부른다. 이와는 반대 개념인, 뛰어난 한국어 구사능력과 더불어 훌륭한 영어를 구사할 수 있는 가산적 이중 언어자(additive bilingual)도 가끔 만나 본다. 그러나 아무런 노력없이 한국어로 말하기, 읽기, 쓰기가 원활하고 영어 로도 말하기, 읽기, 쓰기가 모두 원활한 가산적 이중언어자의 능력을 갖춘 학생이 만들어지는 것은 극소수에 불과한 것이 현실이다.
영어권 국가에 와서도 선천적인 언어능력이 뛰어나서 가산적 이중언어자가 된 학생들이 아니라면 한국어로든 영어로든 자신의 사고 능력을 배양할 수 있는 높은 수준의 언어능력은 노력을 통해 얻어야 한다. 특히 한국인 가정에서 자라고 있는 한국 학생들 대부분은 집에서 부모님들과는 한국어로 의사소통을 하고 학교에서는 영어로 수업을 하기 때문에 자칫 언어의 교란 상태에 빠질 수도 있다. 이럴 때 상당수 부모님들은 영어 공부를 위해 한국어 죽이기(?) 작전에 들어간다. 한국어로 된 책과 TV와 한국 친구들까지도 모두 치워 버리고 NZ TV 방송과 영어 책과 키위 친구들만 사귀라고 특명을 내린다.
그러나 뉴질랜드보다도 다인종, 다문화 사회가 더 먼저, 더 크게 형성되어 있는 미국에서도 영어 공부를 위한 모국어 죽이기는 비효율적이라는 논문들이 계속 발표되고 있다. 하버드 대학교에서 영어가 모국어가 아닌 이민 가정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연구에서는 영어 공부를 위한 모국어 죽이기 작전과, 모국어와 영어 공부를 동시에 병행해 시키면서 영어 공부를 시킨 경우 우리의 일반적인 생각과는 다르게 후자 쪽이 훨씬 더 효과적이라는 결과가 나왔다.
우리의 뇌는 한 쪽의 언어로 고난이도의 사고 과정을 이해할 수 있다면 그 언어와 접맥시킨 다른 언어로도 높은 수준의 사고를 할 수 있도록 만들어져 있다. 세계화를 외치는 시대에 다양한 언어를 구사할 수 있다면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이미 습득한 귀중한 모국어 능력을 미리 죽이지 말고, 두 개의 언어를 함께 공부한다면 학생의 언어 능력은 동반 상승될 것이다. 집에서 부모님과 여러 가지 살아가는 일에 관해, 또한 지식 습득과정에 대한 많은 대화를 한국어로 나눌 수 있고, 그 위에 영어 구사능력을 배워 간다면 그 영어 능력으로 고난이도의 학습과정을 소화해 낼 수가 있다.
필자가 한국어 교육의 중요성을 말하는 또 다른 이유는 정체성(identity)의 확립 문제가 자라나는 학생들에게 아주 중요하기 때문이다. "나는 누구인가?(Who am I?) 나는 어디서 왔는가?(Where am I from?)"라는 질문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해 보는 질문일 것이다. 특히 영어권 국가에 왔으니 빠른 영어 습득을 위해 한국 친구들과는 거리를 두고 키위친구 들을 많이 사귀라고 독려하면서도, 그 영어 능력이 학문을 할 수 있는 수준이 되도록 특별한 도움을 주지 못할 때, 그 학생은 정체성을 확립하지 못하고 방황하는 경우가 생기게 된다. 내가 누구인가를 정확히 깨닫고 자신에 대한 존중감(self-esteem)을 갖고 있는 학생이라면 어떤 또래 집단(peer group)에 끼어 있더라도 주도적이고 진취적인 역할을 잘 감당해 나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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