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4] 남 섬에서 만난 세 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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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08/2008. 1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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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렇게나 흐트러진 머리카락, 호방한 웃음, 그가 오른 산 만큼이나 우뚝한 콧날---뉴질랜드 지폐 5달러짜리에 인쇄된 남자, 에드먼드 힐러리경이다. 그는 1953년 5월 29일, 인류 최초로 에베레스트 산을 정복했다. 정복자와 탐험가는 세상에 널려 있다. 키위들이 광개토대왕을 모르는 것처럼 나는 힐러리에 대해 무관심했었다. 그는 영웅과 위인이 드문 뉴질랜드인의 자부심일 뿐이라고 치부했다. 하지만 나는 지금, 그의 인품과 삶에 매료되었다.
1월 22일, 88세로 생을 마감한 힐러리경의 국장(國葬)이 치러지던 날, 나는 남섬의 크라이스트처치에 있었다. 가뭄이 계속되던 날씨였는데, 그 날은 촉촉이 비가 내렸다. 시내 대성당 앞 대형 스크린에서 장례식 장면을 생중계했다. 성당의 종이 댕그렁 댕그렁 멈추지 않고 울어 대며 힐러리의 마지막 길을 애도했다. 그의 장례식을 국장으로 치르는 데 모든 사람들이 무언의 동의를 한 것은 그가 탐험가이기 전에 우리 모두의 역할 모델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에베레스트를 정복한 것이 아니라 내 마음을 정복했다." "모험은 나처럼 평범한 자질을 가진 사람도 할 수 있다. 모험 없이는 아무 것도 얻지 못한다."
힐러리는 영국의 에베레스트 원정대의 일원이었다. 영국 대원들이 1차로 정상 정복에 나섰지만 실패하고. 힐러리에게 기회가 주어진다. 셰르파 텐징 노르게이와 정상 정복에 성공한 힐러리는, 뉴질랜드 국기를 눈 속에 묻어야 했다. 일제시대 우리의 손기정 선수를 떠올리는 것은 지나친 비약인가. 그는 함께 고난의 길을 걸었던 셰르파에게 모든 공을 돌리고 업적을 자랑하는 일에 겸손했다. 이후 그는 남극대륙을 횡단하고 북극에도 가는 등 탐험가로서의 활동을 멈추지 않았다. 한편으론, 가난한 네팔의 셰르파들을 위해 학교와 병원, 다리, 공항 활주로, 교각 등을 건설해서 네팔의 근대화를 수 십 년 앞당겼다.
'마운틴 쿡'의 전설 '마크 잉글리스'. 그는 '마운틴 쿡' 산악 구조대원으로 일하던 1982년, 심한 눈보라로 얼음 동굴에 갇힌다. 2주 후, 다행히 구조되었지만 그는 동상으로 두 다리를 절단한다. 젊디 젊은 23세 때. 하지만 그의 도전은 멈추질 않는다. 2000년 시드니 장애자 올림픽 사이클 부문에서 은메달을 획득했고, 2002년에는 해발 3천 754미터의 마운틴 쿡산의 아오라키 봉에 오르기도 한다. 2003년 뉴질랜드 정부로부터 공로훈장을 받는다.
"나의 진짜 꿈은 의족으로 에베레스트를 정복하는 것이다." 그의 말처럼 그는 2006년 5월 15일, 47세 때 에베레스트 8848미터 정상에 선다.
"장애우는 능력 부족이 아니라 또 다른 기회를 부여받은 사람들이다."
신화 같은 그의 에베레스트 정복은 전 세계에 뉴스로 타전 된다. 그는 수억 달러를 모금하여 캄보디아의 지뢰피해 장애우들과 소아마비 환자들을 도왔다.
크라이스트처치 시내 공원에 동상이 되어 서 있는 '로버트 팔콘 스코트'. 그는 1911년 노르웨이의 로널드 아문센과 남극 탐험의 경쟁에 올랐던 영국의 탐험가이다. 그 해 12월 14일 아문센은 세계 최초로 남극점에 도달해 노르웨이 국기를 꽂는다. 이보다 35일 늦은 이듬 해, 스코트는 남극점에 도착한다. 그리고 돌아오는 길에 스코트를 비롯한 대원 5명은 전부 동사한다. 켄터베리 박물관에 있는 당시의 모습을 보면 코웃음이 나올지도 모른다. 누가봐도 아문센이 썰매를 끄는 개를 이용하는 등 극지방의 기후와 환경에 보다 더 잘 적응했다는 결론이 나온다. 반면, 빙설차로 영하 70도를 넘나드는 남극을 달릴 수 있다고 생각한 스코트의 판단력과 리더십은 무모하기까지 하다. 그러나 그의 죽음의 의미는 다른 데 있다. 그는 남극의 생태계를 연구하기 위한 표본 채집 등 과학적 탐사를 겸했다. 돌아오는 길에 그는 고생대 후기의 식물화석이 박혀 있는 16Kg의 빙하를 끌고 온다. 다섯 명의 대원들은 썰매를 끌며 눈보라와 강추위와 싸운다. 단지 몇 킬로, 몇 백그램의 짐만 덜었어도 대원들이 모두 살았을지도 모른다. 때문에 그의 2등은 아름다운 것이다.
스코트는 죽는 그 순간까지 남극 탐험 일지를 적었다. 지난해 캠브리지 대학은 스코트의 남극 도착 95주년을 맞아 그의 편지를 여러 장 공개 했다. 그가 아내에게 보낸 편지는 자상한 남편이자 아버지, 의지력 강한 탐험가로서의 면모가 잘 나타나 있다(스코트의 마지막 편지는 아래에 첨부하였습니다).
"내가 생각하는 가장 좋은 죽음은 자신이 원하는 일을 추구하다가 그 과정에서 죽는 것이다."
스코트는 그의 바람 대로 남극의 눈구덩이 속에서 축복 같은 죽음을 맞았다.
과거의 탐험가들은 개인의 명예 뿐 아니라, 식민지 건설에 혈안이 되어 있던 조국의 위상을 드높이기 위해 목숨을 바치기도 했다. 그러나 위의 세 남자에게서 승부욕에 자신을 내던졌다는 냄새는 거의 없다. 오직 처절하게 자연과 사투를 벌인 경외스러운 의지력과 탐험가로서의 순수한 열정, 그 뒤에 얻은 약간의 명예와 부를 인류에게 나눠 주는 숭고한 사랑이 돋보일 뿐이다.
남 섬에서 나는 세 명의 위대한 스승을 만난 것이다.
SCOTT’S FINAL LETTER
To my widow(혼자 남겨질 당신에게)
사랑하는 당신, 우리는 현재 궁지에 몰려 있고, 헤쳐나갈 수 있을 지 알 수가 없어.
짧은 점심 시간에 얻은 약간의 온기를 이용해 다가올 최후에 대비해 이렇게 편지를 쓴다. 첫마디는 당연히 자나깨나 함께 했던 당신에게 하는 말이지. 나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내가 떠나면서 당신이 내게 얼마나 큰 존재였고 당신과 함께 했던 즐거운 시간들을 항상 간직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줬으면 좋겠어.(중략)
우리 아들이 당신에게 위안이 될 거야. 당신과 함께 아이를 키울 수 있기를 바랬지만, 이젠 아들이 당신 곁에 안전하게 있다는 것만으로도 족해.(중략)
여보, 알고 있지? 정 따위에 얽매이지 말고 재혼을 생각해 봐. 좋은 남자가 당신의 인생에 도움이 되기 위해 찾아온다면 당신은 반드시 다시 행복한 삶을 살길 바래.(중략)
여보, 추위 때문에 글을 쓰기가 쉽지 않아. 영하 70도에 텐트 외엔 아무것도 없어. 여보, 내가 항상 당신을 사랑하고 내 마음은 항상 당신 곁에 있다는 거 알지? 오! 가엾은 나, 지금 상황에서 가장 불행한 점은 당신을 다시는 볼 수 없을 거라는 생각이야.(중략)
나중에 더 써보도록 할게.(중략)
위의 글을 쓴 후 이틀간 차가운 음식과 단 한번 따뜻한 식사로 거점에서 11마일 거리까지 이동했어. 거점에 벌써 도착해야 했지만, 거센 폭풍으로 4일 동안이나 발목이 잡혀 있었어. 우리에게 더 이상 희망은 없는 것 같아. 하지만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싸워나갈 거야. 싸움의 끝에는 고통 없는 최후를 맞이할 테니 걱정하지 말아.(중략)
당신도 알겠지만 난 우리 아들의 미래에 대해 염려하고 있어.우리 아들이 자연사(natural history)에 관심을 가질 수 있도록 유도해봐.(중략)
이 모험에 대해 얘기 하자면 끝도 한도 없어. 집에서 게으른 생활을 하는 것과 비교하면 얼마나 멋진 삶인지!(중략)
여보, 어머님께 잘해 드려. 주변 사람들에게도 잘하고.
세상에 당당한 모습으로 살아가도록 해. 하지만 우리 아들을 위한 일이라면 너무 자존심 세우지 말아. 우리 아들은 좋은 직업을 가지고 이 세상에서 뭔가 이뤄야만 해. 클레멘트경에게는 편지를 쓸 시간이 없네. 내가 그를 많이 생각했으며 탐험대장으로 나를 임명해주신 것에 대해 한치의 후회도 하지 않는다고 전해 드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