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9] 영어의 바다에 그냥 빠뜨리면 죽는다
영어 공부와 관련된, 참 잘 지은 책 이름들이 있다. 대표적으로 '우선 순위 영단어, 우선 순위 영숙어'를 들 수 있다. 물론 내용도 좋았지만, 기가 막히게 좋은 제목이었다. 이후 더 큰 출판사에서도 비슷한 내용의 책을 그럴듯한 제목으로 출판했지만 이 책의 아성을 깰 수는 없었다. 뉴질랜드에서 유학을 오거나 이민을 온 학생들을 가르치다가 계속 떠오르는 또 하나의 책 제목은 '영어의 바다에 빠뜨려라'이다. 영어 교육이 너무 문법과 독해 위주로만 치우치던 그 당시 한국적 풍토에서, 영어 원어민과 직접 부딪치고 틀리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이야기하며 생활 속에서 영어를 익힐 것을 강조했던 좋은 내용의 책이었다. 또한 책 제목도 내용 못지 않게 사람들을 끌어당길 수 있는 힘을 갖고 있었던 책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 책의 제목을 피상적으로 자신이 편한 쪽으로만 받아들여서는 안된다. 영어의 바다에 그냥 빠뜨리면 아이가 죽을 수도 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물에 뜨는 훈련도 안된, 물에 대한 공포심만 잔뜩 들어있는 아이를 안전 요원이 지키고 있는 수영장이 아니라 큰 물에서 노는 것이 진짜 수영이라고 바다로 끌고가 풍덩 던져 버린다면 과연 그 아이가 수영을 저절로 잘 하게 될까? 수영에 대한 몇 만 분의 일의 천재적 재능을 갖고 있는 아이도 아닌데 말이다. 물에 대한 공포가 학습되지 않은 개를 물 속에 빠뜨리면 본능적으로 헤엄쳐 땅으로 나올 수 있다. 그러나 영어라는 물에 대한 공포만 잔뜩 학습된 아이를 사방에 물 밖에 없는 영어라는 큰 강이나 바다에 빠뜨리면, 이미 학습된 엄청난 공포심이 물에서 헤엄칠 수 있는 잠재적 능력을 압도해 버려 허부적 거리다 물에 빠져 죽을 수도 있다.
영어권 나라로 준비 없이 학생들을 데려와 학교에 집어 넣으면 저절로 영어를 유창하게 할 수 있다는 생각은 소박 한 착각일 수 있다. 물론 상점들에서 물건을 사거나 친구들 끼리 짤막한 대화를 주고 받는 기본적인 생활 영어는 늘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바닷가에서 허리 정도 밖에 오지 않는 얕은 물에 쪼그리고 앉아 놀거나, 튜브를 타고 노는 것과 비슷한 수준에 지나지 않는다. 영어라는 물에 대한 공포심은 사라지고 친화력이 어느 정도 생긴 정도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정도 실력으로 수영대회에 나갈 수는 없다. 박태환 정도의 대선수는 아니어도 적어도 전국 체전이나 도나 시 대회에 서 입상을 하기 위해 영어권으로 유학을 오거나 이민까지 온 것이 아닌가? 아이가 물에 대한 두려움이 사라지고 물을 좋아 하게 되면 그 때부터는 치밀한 계획을 세워 꾸준히 반복 훈련을 시켜야 수영대회에 나가 입상도 할 수 있고 파도타기 대회에 나가 우승을 할 수 있는 수영 실력을 기를 수 있다. 혹자는 그러다가 수영 자체를 즐길 수 있는 기쁨을 아이에게서 빼앗을 수도 있고, 나아가 아이가 수영 자체에 대해 흥미를 잃게 될 수도 있지 않느냐고 반문할 지도 모른다. 그럴 때는 다시 한 번 아이와 부모 자신들에게 되물어 보아야 한다. 수영장이나 강이나 바다에서 즐겁게 놀 수 있는 정도의 수영 실력을 원하는 것인지, 남들과의 경쟁에서도 이길 수 있을 정도의 선수로 키우려고 하는 것인지. 쇼핑이나 관광하는데 필요한 정도의 영어 실력을 원하는 것인지, 영어를 통해 남들과의 경쟁에서 이길 정도의 영어 실력을 원하는 것인지.
한 달 남짓의 영어 연수가 아니라, 적지 않은 경제적 부담과 기러기 가족의 아픔까지 감수하면서 뉴질랜드에 1년이나 몇 년 정도 유학을 왔을 경우에는 영어라는 바닷가에서 아이가 즐겁게 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고 방심만 해서는 안 된다. 어느 정도 깊이에서, 정말 수영을 하고 있는지, 쪼그리고 앉아 놀고 있는지, 튜브를 타고 있는지, 아니면 물에 들어가는 것이 두렵고 귀찮아서 발만 담그며 바닷가를 친구들과 서성거리고만 있는지 세밀하고 꾸준하게 지켜 봐야 한다. 바닷가를 서성이고 놀다만 가기에는 경제적, 정신적 대가가 너무 크지 않은가? 또한 한국에서 해야 할 공부에 대한 공백으로 인해 귀국 후 지불 할 고통 또한 엄청날 수 있다. 놀 수 있는 물가는 한국의 집 근처 수영장도 있고 물놀이 하는 공원도 있다. 또 수영만이 놀이의 대상일 필요는 없다. 다른 놀이의 대상도 엄청 많다. 바다에서 제대로 된 수영을 배우기 위해서 왔으면 제대로 수영을 배우고 가야 하지 않겠는가? 당연히 때때로 숨이 턱에 찰 정도로 바닷 물도 먹게 되어 영어의 짠 맛도 맛보아야 하고, 바다에서 견딜 수 있는 기초 체력 훈련과 수영 훈련과 안전 훈련도 받아야 한다. 상당기간의 강도 높은 고통이 따를 수 밖에 없다. 그러한 고통을 아이가 겪지 않고 있다면 바다에는 왔으니 당연히 바다에서 수영을 하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을 뿐이다.
이민을 왔거나 뉴질랜드나 호주 캐나다 미국에서 대학을 진학하고자 하는 학생들이 흘려야 할 고통의 땀방울은 더 클 수 밖에 없다. 이 학생들에게 있어서 영어라는 바다는 놀이의 대상이 아니라 삶의 터전이기 때문이다. 바다에서 배운 수영 자체만의 능력을 극대화 시켜 수영(영어) 선수가 되든, 꽤 잘하는 수영능력을 토대로 바다 근처에서 조그만 배로 그 날 그 날 생활비를 벌든, 큰 원양 어선의 선장이 되든, 수영 실력에 관한 한 적어도 프로가 되어야 한다. 영어라는 바다를 통해 인생의 진로를 개척하고자 한다면, 강렬한 햇볕에 등판이 갈라 지기도 하고, 손이 낚시 줄에 베이기도 하고, 타는 목마름에 두 눈이 충혈되기도 하는 피나는 수련기간이 반드시 필요할 것이 다. 이런 고통스런 준비 과정 없이도 영어의 바다에서 살아 남았다고 한다면 그 학생은 그냥 바닷가를 거닐었을 뿐이다. 물고 기다운 물고기도 잡아 본 적이 없이, 거짓 수영을 하면서.
기억해야만 한다. ‘It is impossible to master English in a year.’라는 경구를. 세상에서 가치있는 대가가 주어지는 것치고 쉬운 것은 아무것도 없고, 세상에 공짜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