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집 게라지에는 가을에 사놓은 호박이 여러 덩이 있다. 생쥐 일가족은 호박을 갉작갉작 파먹으면서 행복하게 지낸다. 집 주변에서는 고양이들이 짝을 찾느라 앙칼진 소리를 내지른다. 호박으로 마차를, 생쥐는 말을, 고양이는 시종을 만들어 왕자님의 무도회에나 가 볼까, 신데렐라처럼. 그러나 왕자님과 첫눈에 반해 격정적인 사랑이 불타오르는 그런 애욕의 무도회장에서 12시를 알리는 시계의 종소리를 어떻게 듣는단 말인지. 눈멀고 귀 멀고 입도 뻥끗 못하고 황홀지경에 빠져 있을 텐데---. 망신 당할 일은 애초에 접자. 나는 그저 호박으로 맛있는 죽을 만들고, 쥐가 다니는 길목에 끈끈이를 놓고, 고양이가 발정이 나더라도 조용한 밤을 보내기를 바랄 뿐!
한국을 방문했던 K씨가 두 달만에 돌아왔다. 고춧가루와 쥐포 등을 챙겨서 내게 온 그녀는 눈가에 헤실 거리는 웃음이 번져 있었다. 피부는 뽀얗게 피었고 머리도 최신 유행 스타일로 염색과 파마를 했다. 무엇보다, 시시때때로 눈물을 비쳐가며 우울해 하던 그녀가 생기발랄 해져 온 것이 다행이었다. ‘심신이 더없는 위안으로 평온해졌구나. 그 상태 그대로 유지하면 참 좋겠다.’
하지만 밤 12시가 되면 마차가 다시 호박으로 바뀌고 냉혹한 현실이 눈 앞에 기다리는 신데렐라의 Pumpkin Time처럼 황홀한 시간은 언제나 짧게 끝난다. 꿀맛 같은 고국에서의 시간과 그 행복했던 여운은 2개월을 채 넘기지 못했다. 다시 못된 계모처럼 심술 맞고 냉혹한 이방인의 시간들이 K씨 앞에 펼쳐지므로, 그녀의 표정은 다시 어둡고 초조해졌다.
인생을 단지 이분법으로 나눈다면 '살아지는 시간'과 '살아 내야 하는 시간' 이리라. 신데렐라가 왕자님과 황홀하게 춤을 추던 시간은 너무 행복하고 꿈결같아서 '살아지는 시간' 이었다. 계모에게 학대받고 노동착취를 당하던 시간들은 어쩔 수 없이 '살아 내야 하는 시간'이었다. 그런데 내 경험으로 보면, 인생은 '살아지는 시간'보다 '살아 내야 하는 시간'이 훨씬 길다. 아니, 아무리 희극이라도 배꼽 잡고 웃는 장면은 몇 번 되지 않는 것처럼 죽도록 행복한 시간을 잠깐, 몇 차례 되지 않는다. 어쩜, 인생이 5막 8장쯤 되는 희극이라도 처음부터 끝까지 배꼽 잡고 웃는다는 것은 넌센스가 아니겠는가?
우리는 엄마 배 속에서부터 시간의 지배를 받는다. 정확히 270일을 채우지 못하고 태어나면 인큐베이터 속에 들어가 시간에 맞춰 세상에 다시 나와야 한다. 그리고 옹알이를 할 때 뭐라고 옹알거려야 하고 첫돌쯤이면 엄마에게서 아빠에게로 두어 걸음쯤은 떼어 줘야 한다. 그리고 평생이라는 시간을 적절히 나누어 그때그때 해주어야 하는 일을 해주며 살아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우리는 시간 앞에 무례함을 범하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삶의 주 재료로 생각하고 그토록 떠받들고 살던 시간은 얼마나 냉정하고 텅 빈 것인지---. 나와 살을 부비며 살았던 과거는 낯선 듯 멈춰 서서, 개 닭 보듯이 나를 바라본다. 너무 행복했던 시간 마저 내 시간이 아니었던 듯 생소하기만 하다. 지금 이 순간, 나를 통과하는 시간은 화살처럼 나를 무시하며 지나가고 미래는 머뭇거리며 내게 다가오길 망설이고 있다. 그렇게, 주워 담으려 해도 내 손가락 사이로 스르륵 스르륵 빠져나가는 모래 같은 시간들---, 그래서 성현들은 헛되고 헛되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는지도 모른다.
비가 흩날리는 토요일 오후, 중국 친구 Wong이 좋은 바닷가가 있다고 해서 따라 나섰다. 바다는 비슷한 듯 하지만 저마다 느낌이 다르다. 긴 모래 사장과 쪽빛 물, 물새들, 나무로 만든 긴 다리가 있는 바다는 살풀이 춤을 추는 여인처럼 조용조용 한(恨)을 풀어내고 평정해진 듯한 분위기였다. 나는 벅차 올랐다. 차 오름을 진정시키기 위해 조개 껍질이 파도에 밀려 나란히 늘어선 모래밭을 꼭꼭 누르며 걸었다.
모래밭에 글씨가 써 있었다! <I love granfa><I love nana(할머니)><I love mom> 글자는 크고 작은 하트 집 속에 갇혀 있었다. 물새들은 하트 둘레에 가는 발자국을 어지럽게 찍었다. 불꽃놀이 같았다. 소롯소롯 모래가 쌓이면서 만들어 낸 사랑의 축제 판이었다. ‘아빠를 사랑한다는 글씨는?’ 모래밭 끝까지 걸으며 찾았다. 파도가 휩쓸고 간 것일까? 아빠는 사랑하지 않는 것일까, 싱글맘의 아이인가? 나는 갔던 길을 되돌아오며 못내 섭섭했다. 내가 왜 남의 사랑에 아쉬워하는가? 사랑의 부재는 내 일이 아니더라도 안타깝다. 추운 바닷 바람을 맞으면서도 내 마음이 사뭇 설레고 훈훈해졌던 이유는? 바로 ‘사랑의 존재’ 때문이었다. '사랑'은 제 아무리 고통스럽고 불행한 Pumpkin Time도 행복한 시간으로 변화시키는 묘약이다!!! 내가 왜 그 날 비바람을 무릅쓰고 바다에 가야 했는지---, 시간은 그렇게 내 손을 잡아 끌어 바다로 데려간 것이다. 사랑, 사랑하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