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살아가면서 자신의 생각이 성취되기를 희망한다.
자신의 생각에 맞으면 행복하고 맞지 않으면 불편하고 분노한다.
자신의 사고가 자기 중심적이고 이기적이어서 먼저 자신을 생각하고 행동하기 때문이다.
마음은 언제나 욕망적이고 집착이 강하다. 자신에게 구속되어 객관성을 상실하기 쉽다. 나보다 남을 먼저 생각하는 사랑이 존재해야 하는데 남보다 자신을 우선하기 때문에 자기의 생각이 실현되지 않을 때 독선이 되기 쉽다.
세친의《구사론(俱舍論)》에 나오는 '일수사견(一水四見)'의 비유가 있다. ‘인간은 물을 물이라고 본다. 천인(天人)에게 물은 유리(琉璃)로 보인다. 물고기들에게는 사는 집으로 보인다. 지옥 중생에게는 피고름으로 보인다'고 한다. 같은 물을 두고서도 자기가 처한 입장에서만 보게 된다.
이는 업(業)으로 인한 구조적인 문제이기도 하다.
천인이나 지옥중생의 경우는 이해하기가 좀 어렵지만 물고기의 경우는 알 수 있을 것 같다. 물고기에 있어서는 물은 사는 장소다. 목이 말라서 물을 마신다든지 정원에 물을 주는 것 같은 경우는 생각하지 못할 일 이다. 사실 그렇게 보이는 것은 각자 다르게 보려고 했기 때문이 아니라 자기의 위치에서 그렇게 볼 수 밖 에 없는 것이다.
우리는 누구나 자기의 공간에서만 이해하려고 한다.
그러한 이해를 전부인양 여기게 된다.
그것이 확신으로 연결되면 독선이 된다.
수행이라는 것은 전체를 볼 수 있는 바른 지혜를 완성하는 것이지 부분적 이해를 전체적으로 합리화 하자는 것은 아닐 것이다.
가장이나 기업가나 각 분야의 지도자는 오만을 버리고 객관성을 가져야 한다. 위대한 예지와 결단은 존중되어야 하지만 전체를 바라보는 시각이 부족하면 독선이 된다. 상대를 배려하는 마음없이 나의 생각과 나의 말을 하다보면 환영받지 못한다. 각자의 의식과 수준을 배려하며 살아가야 한다.
남의 의사를 차단하고 자신의 말과 뜻 만을 관철 할려고 하면 피해가 크다.
어느 보좌관이 '우리 지도자는 50년을 앞서 가는 위대한 영도자인데 국민들이 따라오지 못한다'고 하거나 자신의 철학을 관철하기 위해 일방적 토론회로 그 사회를 더욱 고착화 시키는 사태는 암울하다.
열린 마음으로 열린 귀로 자신이 많은 말을 하기 보다 많이 듣는 토론회라면 참가자들도 자신의 역할과 참여에 기쁨과 희망을 가질 수 있었을 것이다.
얼굴 형태상 입이 하나 귀가 둘 있는 것은 말 보다 더 많이 경청하라는 의미이다. 말 많은 사람보다 말을 아끼는 중후한 사람이 되라는 뜻이다.
자신의 뜻이 반영되고 존중되지 않는 가정이나 토론회, 모임, 사회는 얼마나 답답하고 황폐화 되어 갈 것인가?
독선자는 자신의 오만이 비난 받는지 모르고 옳다고 생각한다.
사람을 상처주고 발전을 저해하는 위기인줄 모른다.
고독하지 않고 사람을 얻으려면 각 가정에서 직장에서 사회에서 나 만의 리더를 생각하며 집착하지 말고 공감대를 넓혀 가면서 균형과 조화를 실현해야 한다.
그를 때 자율적이고 사랑과 웃음이 넘치는 가정과 사회가 된다.
일수사견은 나의 뜻이 모든 곳에 다 맞다고 하는 자아 병폐적 진단에 등불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