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3] 낭만벼룩

[353] 낭만벼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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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무살 때, 나는 영문학도를 소개받은 적이 있었다. 그가 첫 대면한 자리에서 불쑥 때밀이(일명 이태리)타올을 내밀었다. “영국 시인 존던의 시 중에 ‘벼룩’이라는 시가 있어요.

ㅡ 내 몸의 피를 빤 벼룩이 그대 몸의 피를 빨았네. 그대와 나는 이미 벼룩 안에서 한 몸이 되었네. (패로디하여) 내 몸을 닦은 때밀이 타올이 그대의 몸을 닦네. 그대와 나는 이미 때밀이 타올 안에서---.”

  지금 생각해보니 유치하기 짝이 없지만, 그때는 정말 신선한 이벤트였다. 순전히 벼룩 때문에, 벼룩으로 시를 쓴 존던 때문에, T.S 엘리어트와 W.B 예이츠와 함께 존던의 계보를 잇는(?) '때밀이 타올’이라는 시 때문에 나는 홀린 듯 몽롱했었다.

  벼룩은 존던의 시에 등장해 얼마나 많은 여자들을 유혹했을까? 그뿐인가. 한때, 유럽에서는 세계에서 가장 작은 서커스가 공연되기도 했다. 벼룩의 가슴에 가는 철사를 매어 뛰기, 튀기,  휘돌기, 그물 건너기 등을 했다고. 물론, 관람 시 돋보기는 필수였다.
  찬란한 사랑의 메신저, 서커스의 광대 벼룩. 내 이불 속에서 그놈의 낯짝을 처음 보기 전까지는 온몸이 짜릿하도록 낭만적이고 사랑스러운 녀석이었다.

  농장에서 배추, 무를 잔뜩 사서 다듬고 절이고 김치를 담근 다음 날 아침, 온몸에 발진이라도 난 듯 울긋불긋 꽃이 피었다. 발작적으로 가려움이 느껴지면 약을 발라도 소용이 없었다. 피부를 꼬집다가 때리다가 손톱으로 짓누르다가---,
  급기야는 도려 내고 싶은 심정이었다. 춘향이가 사또의 수청을 거절해 옥중에 갇혀 있을 때, 그녀를 괴롭힌 것은 ‘빙설 같은 추위와 사정없이 물어뜯는 벼룩’이었다. 이도령에게 보낸 편지에 ‘---심한 것은 벼룩인데---’라고 하소연 하면서 편지 말미엔 손가락을 깨물어 ‘애고 애고’라고 혈서를 썼다. 그 순간 춘향은 이도령이고 나발이고 다 관두고 수청을 들겠다고 외치고 싶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벼룩을 피할 수만 있다면.
  일주일 정도 고통스런 가려움이 계속 되었다. 소파에 앉기도, 침대에 들어가기도, 양털 실내화를 신기도 겁이 났다. 물릴까 봐 두려워서 노이로제에 걸릴 지경이었다. 검은 점만 보면 모두 벌레 같았다. 소독약을 치고 옷과 이불을 모두 빨아 다리미로  다리고, 샤워를 몇 번씩이나 하고, 그 난리를 치고 나면 얼마나 기운이 빠지던지.

  바로 얼마 전, 비가 퍼붓고 바람이 몰아치던 날 습습한 공기를 타고 음흉한 그놈이 또 내게 왔다. 침대에 누워 책을 읽고 있는데, 발가락이 간질간질했다. 나는 이불을 홱 젖혔다. 분홍색 이불 안쪽, 발가락을 덮고 있던 부분에 까만 점이 보였다. 손으로 탁 누르는 순간, 아뿔사, 톡 튀었다. 아하, 벼룩이었구나. 정말 잘 튀는군! 삼국지의 유비가 황건적에게 잡혔을 때, 황건적 두목 마원의가 ‘그냥 놔줘라. 제 놈이 날아 봤자 하루살이요, 뛰어 봤자 벼룩이다’라고 벼룩을 우습게 말하지 않았던가. 잘 튄 벼룩 유비는 후에 촉(蜀)지방에 한(漢)나라를 세우고 황제가 되었다.한 번 튀어 행방이 묘연해진 벼룩은 숨어서 세(勢)를 퍼뜨리고 있는 게 분명했다. 죽일 놈의 벼룩, 고놈의 간이라도 내어 먹고 싶은 벼룩!

  8년 전, 오클랜드에 도착했을 때 우리 가족을 반겨 준 것은 샌드 플라이였다. 허공이 너무 맑아서, 초록이 지천에 널려 있어, 갈매기가 아무 데나 있어 고개를 발 아래 돌릴 새가 없었던 우리는 발목에 흡혈귀의 키스 세례를 듬뿍 받았다. 특히 아들의 가려움은 3,4년 계속 되었다. 아들의 발목은 고목의 옹이처럼 굳은 살이 박혔다. 요즘은 면역이 생겨서 물리더라도 잠깐 가렵고 만다. 아들은 이제 샌드 플라이에 대한 두려움과 노이로제에서 해방되었다. 그는 나보다 빨리 통과의례(通過儀禮)를 거쳐 키위 사회에 동화 된 것이다.
  물 설고 낯설은 이국 땅에서 이민자들이 극복하고 뛰어넘어야 할 과제는 한 두 가지가 아니다. 하늘에서 북두칠성을 찾을 수 없을 때의 당황스러움으로 시작하여 입이 있으되 말을 잘 할 수 없는 답답함, 지상 낙원이라는 이 곳에서 휴일도 없이 동동거리며 사는 서글픔, 정체성의 혼란을 겪는 아이들, 알게 모르게 겪는 차별 대우 등 등.
“나, 네 시간만 자기 집에 가 있으면 안 돼?  소독약 쳤거든.”
  애들 세 명을 데리고 내 집에 온 기러기 엄마 B는 벼룩에게 처참히 뜯긴 딸의 여기저기를 보여 주면서 눈물짓는다. 절대 긁지 말고, 견뎌 내야 해, 이를 악물고---.
  때때로 나를 불운하게 만들었던 벼룩, 이가 보드득 갈리는 그놈!

  한편, 탄력있게 튀어 오르던 그놈의 포즈가 매력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머지않아 다시 돌아올 벼룩은 낭만적이고 사랑스러운, 나의 스무 살 그 시절, 그놈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