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3] 식물의 사생활(2)---넌 어느 별에서 왔니?

[343] 식물의 사생활(2)---넌 어느 별에서 왔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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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븐 스필버그의 영화 ET를 떠올려본다. 눈이 얼굴의 전체를 차지할 만큼 크고 주름투성이인 ET가 긴 손가락을 내밀어 인간의 손가락과 조우하는 순간, 지구인들은 주체하기 힘든 감동을 느꼈었다. 자전거가 하늘로 날아올라 달과 오버랩 되는 장면도 두고두고 회자되는 명장면이다. 그런데 ET의 직업은 무엇이었을까? 휑뎅그레한 눈과 기형적으로 발달된 머리가 어찌보면 멍청해보이는 ET, 그러나 그는 식물학자였다. 그가 지구에 온 목적도 식물을 채집하기 위해서였다. 보기와는 달리 그는 꽤 유능해서 다른 행성으로까지 파견 근무를 나왔던 것이다.

그러고보니 NASA(미항공우주국) 등의 탐사선에서 찍어보낸 여타의 혹성은 참 삭막한 모양새였다. 곰보 투성이거나 검은 바위 뿐이거나 누런 사막이 전부였다. 탐사선이 애써 찾아 헤매는 것도 유전자를 가진 생명체이거나 생명체가 살았던 흔적, 한포기의 풀, 한 줄기의 물이 아니었던가. 그런 우주에서 고도로 발달된 천체 망원경으로 지구를 본다면 초록 벌판은 얼마나 생소하고 궁금한 색이었을까. 우주인의 마음까지도 꿰뚫는 스필버그는 과연 천재임에 틀림없다.

초록별 지구에 산다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축복받은 존재다. 더구나 초록의 나라 뉴질랜드에 사는 우리는 더욱 선택받은 존재인 듯 싶다. 말도 못하고 움직이지도 못한다고 식물들이 아무것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것은 인간의 오만한 생각이다. 다리가 있어야 움직일 수 있다는 생각도 편견에 불과하다. 물을 좋아하면 물가에,햇볕을 사랑하면 양지 쪽에, 서늘한 그늘을 원하면 음지 쪽에서 그들은 살아가고 있다. 한 실험에 의하면 나뭇꾼이 도끼로 한 나무를 쳐대기 시작하면 숲 속의 에너지 파장이 달라진다고 한다. 나무들이 위기 의식을 느껴 벌벌 떤다는 것이다.

내 집의 뒷뜰에는 보호수인 노포크아일랜드 파인 트리가 한 그루 늠름하게 서 있다. 그 녀석의 가지를 치기 위해 시티 카운슬의 허가를 받아야 했다. 나는 다섯 단의 가지를 치기를 원했는데,허가가 떨어진 것은 네 단이었다. 나무가 놀란다는 것이었다.

가지를 치고 나자 나무의 상채기에서는 하얀 진이 눈물처럼 혹은 피처럼 줄줄 흘러내렸다. 어느 정도 흐르자 그 진물은 눅눅하게 굳어 상처부위를 감싸 보호했다. 나는 나무도 상처가 나면 아파한다는 것을 느꼈다.

식물은 입이 없어도 말을 한다. 맨 처음 식물이 내게 말을 건넸을 때 나는 정말 놀랐었다. 그날,학교에서 돌아온 아들이 황급히 교복 바지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냈다. 초록 머리에 흰 꼬리가 달린 올챙이 모양의 식물이었다. 생물 시간에 식물의 발아에 대해 실험한 것이라고 했다. 물먹은 솜 위에 무(radish) 씨를 놓고 며칠 지나면 그런 모양이 된다는 것이었다. 실험이 끝난 싹들은 모두 쓰레기통에 버려졌는데, 아들은 녀석들을 챙겨온 것이다. 우리는 무싹들을 다시 촉촉한 솜 위에 올려주었다.

“살려줘서 고마워요.아유,목말라 죽을 번 했네.”

무싹들은 뿌리를 길게 뻗으며 물을 빨아올렸다. 죽음의 위기에서 다시 살아온 무싹은 그 후 건강하게 자라 나의 텃밭에 옮겨졌다. 그 녀석들 중에는 옹녀와 변강쇠가 있었다. 붉은 루비 색깔의 무들이 설핏설핏 검은 흙 사이로 보여 살짝 꺼내보니 가슴과 엉덩이 곡선이 영락없이 여체를 닮았다. 아들과 나는 ‘옹녀’라고 이름을 붙이며 깔깔 웃었다. 그 옆에 무는 뿌리를 고구마처럼 실하게 키우면서 어찌나 많은 씨를 맺어대는지 ‘변강쇠’라는 이름이 제격이었다. 그 후 우리는 적절한 관심과 사랑과 물과 햇빛만 있다면 모든 씨는 싹을 틔울 수 있다는 믿음이 생겼다.

내 아들은 과일을 먹다가 유난히 맛있는 녀석이 있으면 씨를 받아서, 발아되기 쉽게 겉껍질 등을 손질한 다음에 솜 위에 올려두곤 한다. 그렇게 얻은 녀석들이 선룸에서 고물고물 자라고 있다. 당나귀 귀처럼 큰잎을 축 늘어뜨리고 항상 낙천적으로 사는 아보카도, 우아하고 수줍은 귀족처녀 망고, 흙이 맘에 안들어 물도 맛없어 불평불만이 많은 찌질이 체리, 키도 한뼘밖에 안되는 게 벌써 가시를 달고 잘난 체 하는 공주병 환자 귤, 땅 넓은 줄은 모르고 하늘 높은 줄만 아는 키다리 자두,유난히 맛있는 혜정이네 피조아는 씨가 모두 발아되어 다섯 그루-동방신기다.

“난 바람 좀 쐬고 싶어. 선룸에만 있으니까 답답해.(나도 여행을 가고 싶단다)”

“난 빨리 커서 연애하고 싶어.(후훗,연애란 삶의 활력소지)”

“방이 좁아졌어,큰방으로 옮겨줘요.(필요없는 물건들을 치워보렴)”

까마득한 옛날에 외계의 식물학자가 어느 별에선가 예쁜 놈만 골라다가 지구에 심어놓은 것이 아닐까. 녀석들과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다보면 내가 식물인지 식물이 나인지---. 나는 아무런 욕심도 내지 않고 아무도 그리워하지 않고, 아무도 미워하지 않으며, 아무런 걱정도 없이 그네들의 별나라 속삭임에 귀를 기울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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