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수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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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2/2006. 23:10
박신영 ()
최근 임수경에게 악플을 단 사람들에게 실형조치가 내려졌다고 한다.
2005년 7월 익사한 임수경의 외아들에 관련한 인터넷기사에 욕설등 비난 댓글을 단 일반인 십수명이 처벌된 것이다. 이로써 임수경은 다시 한번 ‘화제의 인물’이 된 것 같다. 임수경이 도데체 누구인지, 남한사람인지 아닌지 조차 모르는 요즘의 젊은이들에게 이 ‘역사의 인물’은 자신의 존재를 제대로 드러내는 계기가 되었다고나 할까.
임수경이 북한에 갔던 89년, 그당시에 유행하던 유머가 있었다.
딸키우는 부모는 항상 조심해야 한다. 딸이 초등학생일때는 유괴될까 걱정이고, 중학생일때는 빨간마후라같은 섹스비디오 찍을까 걱정이고, 고등학생때는 원조교제할까 걱정이고, 대학생되면 어느날 갑자기 북한에 가 있을까 노심초사한다
전해지는 말로는, 당시 임수경의 부모들도 전혀 몰랐다고 한다. 딸이 어느날 갑자기 북한에 가서 주민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는 모습이 TV에 나와서 몹시 놀랐다고 하니까......
그 당시는 북한과 관련된 반미, 민주, 통일, 뭐 그런 류의 것들은 모조리 비밀스러운 것들로 치부되었던 시절이었으니까 ‘당연히’ 부모에게조차 비밀로 하고 북한에 갔겠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대학생이 되어 ‘학문탐구’에 열중해야 할 시기에, 툭하면 최루가스가 코와 눈을 자극하고, 뭔가가 벌어지고 있다는 흥분된 분위기에, 강의는 휴강이 태반이고, 대학생이라면 그같은 민주화 운동에 어떡하든 동참해야 옳은 생각을 가진 인간처럼 느껴지고.......그 때는 그런 시절이었다.
하지만, 성적장학금에 목숨걸고, 도서관에서 엉덩이 뼈가 아프도록 의자에 앉아있고, 음성자료실에서 귀가 멍멍하도록 영어테이프를 들었던 내게는, 같은 대학생이고 같은 여자였지만, 그녀의 방북은 굉장히 낯설었다.
나와는 너무나 다른 길을 가는 동년배를 바라보는 심정이었을까.
그런 사람은 또 있었다.
나는 그를 19살에 만났다.
서로 좋아하고 서로 애틋하게 바라보면서도, 같이 아름다운 사랑의 추억을 만들 틈도 없이, 첫키스 조차 없이, 쓸쓸하게 돌아섰던 그 첫사랑도 나와는 몹시 다른 길을 가고 있었다.
성실하고 머리좋고, 그래서 소위 대한민국의 일류대학에 들어갔고, 대학생이 되어 ‘얌전히’ 학교만 잘 다녔으면 졸업하고 대기업에 취직하고 돈벌고 결혼하고 애낳고....그렇게 사회의 주류가 되어 평범하게 살 수 있었을텐데
그는 부모조차 인정하지 않으려 하고 학교와 사회가 외면하고 심지어는 무지막지하게 탄압하는 그런 길을 가고 있었다. 민주화와 평화통일과 사회정의를 위해 자신의 개인적인 생활을 포기한 듯.....
그를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 그는 서너 개의 주민등록번호를 외우고 있었고, 낯선 이름의 학생증을 가지고, 자신의 연락처도 밝힐 수도 없는 수배자였다. 사람을 죽인 것도 아니고 도둑질을 한 것도 아닌데, 그는 스물네살의 춥고 배고픈 도망자였고, 나는 그런 그를 쫓아가고 싶어도 갈 수도 없고 또 정말 그를 끝까지 쫓아가기에는 너무 ‘현실적’인 여자였다. 말없이 같이 버스를 타고 나를 집앞 골목까지 바래다 준 것이 그가 내게 해 줄 수 있었던 마지막 최선이었을 것이다.
그 이후 그를 만난 적도 없고 그의 소식을 들은 적도 없지만, 임수경은 ‘통일의 꽃’으로서 언론의 집중조명을 받으며 역사적인 인물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렇게 16년이 흘렀고 이제 그녀는 여전히 ‘사회기관단체인’으로서 한국사회의 명사이다. 문인환 목사의 기념사업회 사무국장님이고 통일에 관한 TV진행도 맡았다. 이혼하고 혼자 외아들을 키웠지만 그 아들을 필리핀으로 영어어학연수까지 보낼 정도로 이제 그녀는 더 이상 적대적인 반미주의자는 아니었던 모양이다. 아니 오히려 지금은 오히려 확실한 기득권의 대표가 아닌가. 하긴 그때에 그녀자신도 자기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제대로 알고나 있었을까, 겨우 스물 두 살의 철부지 였을텐데.......하지만 아마도 스스로는 자신이 대단한 일을 하고 있다고 느꼈을지도 모른다.
나는 3년전 금강산 여행을 갔었다.
금강산의 아름다움에 대해 너무나 어렸을 때부터 교육받아왔었는데, 하지만 슬프게도, 나무 한 그루 찾기 힘든 민둥산에다가, 큰 바위에는 반드시 커다란 글씨로 빨갛게 새겨진 위대한 수령 어쩌고 저쩌고 하는 예의 그 뻔한 말씀들, 곳곳에 세워진 그분과 ‘민족의 어머니’ 김정숙여사의 영광스러운 방문기록들, 꼬치꼬치 간섭하고 제지하는 북측, 남측 안내원들까지.......
일단의 관광객들과 안내원들이 저멀리 등산로로 사라지고, 뒤쳐진 6살 아들과 나는 천천히 산책하듯 걸으며 이곳이 과연 금강산일까 우리동네 뒷산 광교산일까 혼돈이 오고 있었는데,
재영 왈, “엄마, 쉬마려”
노상방뇨를 포함한 ‘해서는 안 될일’에 대해서 안내원으로부터 사전 교육을 여러번 받았고, 그 위험성과 벌금에 대해서도 알고 있었지만, 나는 주위를 둘러보고 얼른 아들의 바지를 내려주었다. 금강산 자락에 시원하게 오줌을 털고 난 아들을 보면서, 아무도 모르게 이 일을 해치운 우리모자처럼, 누군가 아무도 모르게 이 나누어진 민족을 다시금 통일하기 위해 뭔가 일을 벌이고 있을까, 오래전 임수경이 그랬던 것처럼, 그 사람이 꿈꾸었던 것처럼.....
버스를 타고 비포장 북측 분계선을 빠져나오고 있을 때, 어디선가 나타난 북측 군인들, 그들은 열몇대의 남측 관광객 버스를 다 세웠다. 그리고 우리가 탄 버스로 올라와 이안에 누군가가 카메라촬영을 했으니 그것을 검사해야 한다고 했다. 오래지 않아 40대 중반의 평범한 한 남한인이 버스밖으로 나갔고 그가 가진 최신 디지털카메라는 아무런 설명도 없이 ‘압수’당했고 그는 같이 여행중이던 남한인들로부터도 야유를 받고, 남한 안내원들에게 혼하고, 북측 장교들에게서 어떤 경고도 받고, 하여간 지루한 기다림끝에 그는 ‘무사히’ 우리버스에 다시 올라탄 것만으로도 감사해야 했다. 그 남자가 저지른 잘못은 사진촬영금지라는 주의사항을 무시한 것이었다. 하지만 사진으로 찍을 만한 것도 없었다. 버스가 달리던 십몇분동안 사방은 아무 건물도, 어떤 이정표도 없는 그냥 초겨울의 썰렁한 회색 들판뿐이었다. 허락되지 않은 촬영이 우리버스내에서 있었다는 사실을 북측이 어떻게 알았는지가 놀라울 뿐이었다.
낭만적인 감정들-분단, 비극, 이산, 슬픔, 고통, 화해, 평화, 통일-은 이제 그만 접어야 할지도 모르겠다.
서로 다름을 이해하기란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