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은 아니에요. 10년쯤 후에나 찍으세요”
누군가가 던진 달콤한 위로의 말에 귀에 솔깃했던 순간을 생각하며 씁쓸하게 웃어본다.
어느 포토 샵에서 영정 사진을 찍어 준다는 광고가 났을때부터 나도 찍어야 할까 말아야 할까 흔들렸던 마음.
영정이란 말 자체가 기분좋은 말이 아니기에 성큼 죽음의 문턱에 와 있음을 일깨워 섬찟했다.
예순 두 살의 건강한 올케가 갑자기 쓸어져 세상 뜨는 것을 보지 않았던가. 그야말로 영정 사진이 마땅찮아 일주일 전에 시집보낸 딸의 예식장으로 달려가 결혼식때 찍은 사진을 뽑아오던 일을 생각해내며 남겨진 사람들의 황망함을 덜어주기 위해서라도 이쯤해서 사진 한 장 준비하는 것도 좋은 일이라 어줍짢은 자존심도 접어 두기로 한다.
겨울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오후, 내 죽음 앞에 놓여질 사진을 찍으러 가면서 비를 먹음고 푸르름이 더욱 싱그러운 들판이며 높다랗게 키 자랑을 하는 거목의 당당함이 왜 그리도 부러운지……. 갑자기 자연과 친숙해짐을 영원으로의 가까운 길목에서 느끼는 마지막 여유일까. 지금 이 순간부터 짧은 시한부 인생을 사는 거라고 가정하면서 내가 지금까지 살아온 삶을 뒤돌아보며 반성하는 시간으로 해본다.
정신없이 앞만 보고 달려온 인생 고개에서 언제부터 내리막길로 바뀌었는지 알수없는 사이에 벌써 종착역이 멀지 않았단다. 내 인생의 정점은 언제 어떤 모습으로 도달했었는지 어느 때가 그 때 였는지 알길이 없다. 잠깐 고운 비단길도 있었을테지만 그보다는 험난한 길을 더 많이 헤치면서 여기까지 온 것만 같다. 그동안 삶의 무게와 가치를 어디에 두고 살아왔나. 내 이웃이나 내 친구들에게 얼마만큼 마음을 나누고 살아 왔는지도…, 앞으로 남은 여백엔 무엇을 채우며 살아야 할지 깊은 사색으로 떠오르게 한다. 그리고 밀린 숙제가 많은 것처럼 조급함으로 가슴이 죄어 오기도 했다.
정차와 동시에 안에서 흘러 나오는 낯익은 목소리의 깔깔거림을 들으며 꿈에서 깨어나듯 현실로 돌아온다. 나는 아직 건강하게 살아있지. 죽음같은 것 멀리멀리 접어두고 반나절 운동으로 흘린 땀을 닦아 내며 예쁘게 보이려고 얼룩진 얼굴에 분칠을 덧입혀 본다.
(참 많이도 늙었구료) 희, 노, 애, 락이란 단순한 어휘로는 부족하다. 사랑과 분노와 미움과 시기, 질투 슬픔과 기쁨, 노여움 번뇌 고통 등 긴 세월 응집된 표정이 수없이 바뀌어 머물러 버린 고상하지도 부드럽지도 않은 나무나 낯선 내 얼굴. 눈가에 패인 주름이며 늘어진 목살이 거울 속에서 비웃고 있다. 큰 거울 보기가 두려워 작은 손거울로 화장을 하며 자기 최면에 걸려 살아오는 요즈음이 아닌가. 거울의 솔직함조차 용서하고 싶지가 않다. 골 깊어 가는 늙음을 어찌 막을 손가.
곁에 둘러서서 히히덕 거리는 친구들의 부추김이 없었다면 실망스런 영상으로 나를 바라봐야 하는 그 고통스러운 의자에 앉기도 슬펐을텐데 그들과 만났음이 그나마 다행스럽다.
누가 먼저 저 세상으로 떠나 검정리본을 달 것인가. 차곡차곡 액자에 담긴 면면들이 저마다 억지 미소를 먹음고 하나같이 인자(?)스럽다.
“윤달 드는 해에 이런걸 준비하시면 오래 사신답니다.” 봉사하시는 분의 배려와 고마움으로 위로를 삼는다. 늙은 사람들 달래느라고 만들어 낸 말 일 테지만. 그러나 세상 순리를 따라 사는 것도 인생의 참 도리인것 같아 10년 후에나 찍으라는 말에 속지 않고 선뜻 용기를 낸게 참 잘한 것 같다.
자손들의 슬퍼하는 모습을 그윽히 내려다보는 자애로운 어른의 모습을 담아 내려고 “웃으세요, 웃으세요.”
하면서 굳어진 표정을 퍼 주느라 애쓰는 젊음이. 주름진 노안에 미소를 심어주는 분들의 영원히 늙지 않을 것같은 젊음이 부럽다. 우리도 불과 얼마 전에 가졌던 젊음이 아닌가. 돌아보는 길목에선 부질없는 생각을 해본다. 기왕이면 겉모습만 찍은 사진이 아니고 마음속 깊은 진실까지 찍어내는 것이었으면 좋았을걸. 얼굴보듯 서로의 마음까지 편하게 바라보면서 살 수 있었으면 세상 살기가 좀 더 쉬워질텐데…, 얼마 남지않은 삶, 사랑의 고운 색깔로 모든이의 마음속에 따뜻한 향기로 스며들게 살 수 있었으면 하는 간절한 바램을 갖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