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강점기의 민족사학자 단재 신채호(丹齋 申采浩, 1880-1936) 선생은 “역사를 잊어버린 민족에겐 미래가 없다”라고 경고했다. 이를 뉴질랜드 다민족 사회에 대입해보면 “자기 민족의 뿌리를 잊어버리고 떠도는 소수 민족에겐 미래가 없다”라고 말할 수 있다. 마오리족은 천 년 전에 이미 이 땅에 뿌리를 내리고 살아왔지만 간직해온 역사가 없기 때문에 그 존재감이 미미해지고 있다. 뉴질랜드의 한인들이 한민족의 뿌리는 물론 이 땅에 와서 한민족의 삶을 개척해온 이민 선조들의 역사를 모르고 지낸 다면 뉴질랜드 한인들의 미래는 없다고 본다.
다행이 뉴질랜드 한인 사회에서는 2007년 말에 ‘뉴질랜드 한인사’를 출간하여 750만 재외 동포 사회에서 뉴질랜드 한인도 그 존재감을 나타내게 되었다. ‘뉴질랜드 한인사’에서는 1950년 이후 진행되어 온 한-뉴 관계와 한인들이 뉴질랜드에 출입하고 정착해온 과정을 기술하여 후손들이 뉴질랜드 이민 역사를 잊지 않도록 기록을 남겨주게 되었다.
1948년 한국정부가 수립되자 뉴질랜드 정부는 1949년 7월에 한국을 정식 승인해주었다. 1950년에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뉴질랜드 정부는 UN군의 일원으로 참전하였고 현재까지 참전용사들과 끈끈한 유대관계를 지속하고 있다. 1962년 3월에는 한-뉴 외교관계를 수립하고 무역, 경제, 기술협력 관계를 중대해 나가기 시작했다. 또한 콜롬보 플랜에 의한 한국 유학생들이 뉴질랜드 정부의 전액 장학금 지급으로 낙농, 원예, 임업 분야의 생산과 마케팅 공부를 하고 돌아갔다. 또한 영어교사들은 단기로 영어 연수를 다녀가기도 하였다. 1968년 9월에는 박정희 대통령이 뉴질랜드를 국빈 방문했고 10월에는 Holyoake 뉴질랜드 총리가 한국을 답방하였다. 그 후 1971년 7월에 주뉴질랜드 한국대사관이 개설된 것이다.
지난 2011년에 뉴질랜드 한국대사관 개설 40주년을 맞이했고 2012년엔 한-뉴 수교 50주년을 기념하여 몇 가지 행사가 있었다. 2013년엔 오클랜드 한국무역관 개관 40주년을 맞이하여 지난 역사를 회고해보는 자리가 있었다. 금년은 뉴질랜드에서 최초로 한인회가 결성된 지 40주년이 되는 해이다. 오늘날의 한인사회가 형성되기 까지 과거의 발자취를 되돌아보고 미래를 설계하는 계기로 활용하여야할 것이다.
필자는 40년 전에 한인총회가 열렸던 파머스톤노스(Palmerston North) 소재 Caccia Birch House 를 방문하여 이민 선배들의 흔적을 더듬어보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마침 파머스톤노스 한인회에서 주최한 차세대 세미나에 강의 차 내려간 길에 좋은 기회를 포착한 것이다. Caccia Birch House는 뉴질랜드 개발 초기 대 목장주의 저택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지금도 파머스톤 노스 시에서 역사적인 유산으로 관리하고 있다.
1974년 당시에는 한국식품점, 한인식당, 한인교회 등은커녕 한국말을 하는 사람조차 만나기가 어려웠던 시절이었다. 소수의 한인들은 고국에서의 생활이 눈에 어른거려 눈시울을 적시는 일도 다반사였다. 뉴질랜드 내의 한인규모가 어느 정도 커지자 자연스레 한인회의 설립이 논의되기 시작하였고 그 해 10월 25일에는 당시 강춘희 대사관저에서 ‘재뉴질랜드 한인회’ 창립모임이 열렸다.
뉴질랜드 전국에 흩어져 있는 한인들은 단기 체류로 드나들었던 원양어선 선원, 장·단기 체류를 하고 있던 콜롬보 플랜에 의한 유학생, 국제결혼으로 영주하고 있던 몇 가족 들이었다. 그리고 대사관과 무역관 직원 및 가족들을 모두 합해봐야 72명에 불과한 규모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인총회에는 40여 명이 참석하였는데 이는 가족 동반으로 각자 살고 있던 지방에서 승용차로 또는 버스나 비행기 편으로 모여들었음을 의미한다.
초대 회장으로는 박흥섭 씨가 선출되었다. 박흥섭 회장은 당시 콜롬보 플랜 유학생으로 매씨대학교(Massey University)에서 박사과정(원예학 전공)을 이수하고 있었다. 매씨대학은 파마스톤노스에 소재하고 있으며 회장이 거주하고 있던 파머스톤노스에서 총회가 열렸던 것이다. 박흥섭 회장은 귀구 후 전남대학교 교수가 되었고 키위 과일을 한국에 처음 소개하였으며 2004년에 작고하였다. 뉴질랜드에서 태어난 박흥섭 회장의 아들 박진형 씨는 1990년대 후반에 뉴질랜드에 돌아와 뉴질랜드 육군으로 근무한 바 있으며 현재 오클랜드에 거주하고 있다.
한인 총회에서는 모임 후 Birch House의 잔디 운동장에서 축구, 탁구, 달리기 들을 하며 하루를 즐길 수 있었다. 지구 반대편의 머나먼 뉴질랜드 땅에서 한인들만의 식사와 여흥이 얼마나 감격스러웠을까 짐작이 간다.
뉴질랜드 한인 사회의 규모가 커지면서 1991년부터는 각 지역별로 한인회가 결성되었다. 현재는 북섬에 오클랜드, 웰링턴, 와이카토, 로토루아, 황가레이, 파머스톤노스, 왕가누이, 남섬에 크라이스트처치, 더니든, 넬슨, 퀸스타운 등 11개의 한인회가 조직되어 있다. 이들 한인회들을 중심으로 한인사회가 네트워킹을 형성하여 우리의 후손들의 미래를 밝혀주어야 할 것이다.
[이 게시물은 KoreaPost님에 의해 2014-09-24 07:46:35 칼럼에서 복사 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