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갖 새들이 지저귀는 아름다운 합창의 향연이 한바탕 끝난 한나절, 유리창에 부디치는 소슬한 바람소리뿐. 인적없는 절간같이 고요만이 남는다. 이럴때 아늑하고 마냥 편안한 느낌에 책이라도 읽고 있으면 조용해서 집중도 되고 얼마간은 참 좋다.
문득 밖으로 시선을 돌려보면 햇빛 부서지는 마당가에 게으른 고양이가 배를 깔고 길게 누워 낮잠이라도 즐기는지? 요즘같은 추위에 집안 가득 깊숙이 들어와 쉬었다가는 햇님의 따사로운 입김에 등을 녹이다보면 눈꺼풀이 저절로 내려앉아 고양이를 닮은 모습으로 깊은 오수의 늪에서 주책없는 낮 꿈을 꾸기도 한다. 이런 모양새가 얼마나 대책없는 무기력으로 보일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 때 소스라쳐 놀라 정신을 가다듬는다. 건강한 의식을 이렇게 맥 놓고 허비하다니?.... 외롭고 고독하다고 등줄기가 오싹해진. 감정의 사치에서 벗어나는 일은 의욕을 갖는 것 뿐이다.(그래 사람구경이라도 나서자) 추위와 맞서려고 주섬주섬 옷을 꿰어 입는 모습이 마치 전쟁터에 나가는 군인처럼 그렇게 밖으로 뛰쳐 나간다. 이럴때 두 다리가 별일 없다는 게 얼마나 고마운지 모른다. 팔도 마음놓고 휘두르고 몸도 가볍다는게 다행스럽다. 사람들 속에 묻히면 젊은이들 걸음걸이 하나에도 기운이 솟는다. 윗몸을 전부 드러내고 미니 스커트 차림으로 추위가 아랑곳없는 그들을 바라보는 것 만으로도 의욕이 살아나는 듯한 느낌이 다가온다. 무엇이 그리도 바쁜지? 누구를 만나려는 걸음걸이인지 표정이 밝고 명랑하면서 발랄하다. 내가 잃은 게 바로 저런 것이었구나! 라고 깨달았을 때 무언가가 가슴 밑에서 끓어오르고 있음을 느낀다.
씁쓸한 커피한잔 싸늘하게 식어 갈 때까지 온갖 형상으로 스치고 지나가는 사람들과 벗하면서 기껏해야 이 정도 살고 있음을 의욕이라 해야 하나? 의문을 던지기도 한다. 가장 넉넉하게 쓸 수 있는 시간을 맥없이 허비해 가는 때가 인생의 종착역으로 가는 순간임을 알게 되니 안타깝고 허망할 뿐이다.
언제인가 까페를 운영하던 어느 교포 한 분이 하던 말이 생각났다. 주택가 인근 쇼핑몰에 있는 까페는 노인들이 단골이어서 장사가 되는 편이라고.... 오전 한나절 머핀이나 파이 한조각 커피한잔 시켜 놓고 마냥 노닥거리다가 돌아간 그들이 오후가 되면 또다시 홀을 메워 주는 단골 고객이란다. 벌써 오래전에 비워진 싸늘한 찻잔을 내려다 보며 나 자신도 그들과 동참해 가고 있음을 부인할 수가 없다. 빈집에서 몸과 마음이 얼어 붙어 사람구경을 나온 사람들, 이럴때 말 받아 줄 친구가 있다는 게 얼마나 큰 행운인지. 떠들썩한 삶의 현장에서 쳐져 가는 의식을 추스르며 세상에 도전하는 서글픔 속에서 복받쳐 오르는 감정의 여백에 글을 쓰고 건강유지를 위해 운동도 하고 부족한 힘을 채워 넣으려고 약도 먹는다. 삶의 의욕이란게 바로 이런것인가? 이런것 밖에 할 수 없음을 슬퍼하면서 말이다. 여기가 한국이라면 좀 더 다른 삶을 살수 있지 않았을까? 이 핑계 저 핑계. 이탓 저탓 해 봐야 소용이 없다. 어차피 부질없는 넋두리 일 뿐. 인생은 그렇게 그냥 흘러가고 마는 것인가 보다.
요즈음은 유난히 아기들이 예쁘다는 걸 깨닫는다. 꽃도 갓 핀 여린꽃이 더 곱고 예쁘듯이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아기들을 보면 내 애들을 기를 때 와는 다른 느낌으로 너무 예쁘다. 엄마 곁에서 부시럭 거리고 칭얼대는 아기들이 인형처럼 귀여워 덥석 안아 주고 싶은 충동을 받는다. 인도나 파키스탄 애들인지? 반질한 까만 피부에 속눈섶이 치켜올라간 깜찍하고 커다란 눈. 아름답게 잘 매만져 꽂은 꽃꽂이보다 그들과 만나고 그들을 보는 게 더 즐겁고 감동적이어서 키위 신부님 영어강론 듣지 못해도 언제나 마음이 훈훈해지고 뿌듯해서 돌아 오는 주일미사.
먹은 나이가 등을 눌러 고단할 때에 파릇한 새싹으로 돋아난 힘찬 생명력으로 꿈틀대는 그들을 보면 활력의 기(氣)를 받듯 발걸음이 가벼워진다.
평생을 거의 사람 속에 치여 살던 내가 아닌가? 이제 사람이 그리워 사람 구경을 나오다니... 나이탓이겠지. 아니면 여기가 과연 평화의 나라 뉴질랜드여서일까? 이제 고국땅을 밟고 남대문 시장엘 가면 출렁대는 사람물결에 현깃증이 나서 겁을 먹고 돌아서는 이방인이 되었다. 아내와 엄마 그리고 사회생활로 바빠 늘 동동거리는 사십대 주부 내 딸, 엄마의 느슨한 시간을 부러워하는 눈치가 보일 때 하는 말이 있다. "지금 네 때가 인생의 황금기란다"라고 또다시 먼 훗날 오늘을 돌아다 볼 때 역시 아름다운 추억의 그림들이 있어야 하기에 나는 오늘도 사람들 속에 섞이면서 행복한 그들을 닮아 살려고 애를 쓴다. 흉잡히지 않는 노년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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