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방인

이방인

0 개 1,920 코리아포스트
카뮈의 '이방인'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주인공 뫼르소는 동료의 싸움에 휘말려 불량배 한 명을 사살하게 된다. 뫼르소는 법정에서 '태양 때문에 사람을 죽였다'고 진술한다. 그게 말이나 되는 얘기인가? 그렇지만 그건 사실이다. 불량배가 꺼내든 단도에 해변의 강렬한 햇빛이 반사되었다. 뫼르소는 아찔한 현기증을 느꼈고 방아쇠는 당겨진 것이다.

'당신이 말하면 할수록 역효과가 난다. 당신은 법에 대해 잘 모른다. 단어 선택 하나 잘못 해도 재판에 치명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으니, 입 다물고 있어라. 내가 다 잘 알아서 할 테니 나만 믿어라.'

변호사는 이렇게 말한다. 재판은 멋대로 흘러갔다. 뭔가를 호소하고 싶었던 뫼르소는 목까지 차 오르는 말들을 삼키고 삼켰다. 마침내 뫼르소는 자신의 재판을 구경하는 구경꾼이 되어버린다. 이보다 더 부조리할 수는 없지 않은가? 당사자는 빠져 버리고 판 검사, 변호사, 증인들이 사건을 재구성한다. 그들은 살인 사건과는 관계도 없는 뫼르소의 사생활을 뒤져내서 '악마 같은 놈'이라는 퍼즐 조각을 일 년에 걸쳐 완성한다. 그리고 뫼르소에겐 사형이 언도된다. 결정적 퍼즐의 한 조각은 '어머니의 장례식날 눈물을 보이지 않았고 여자와 히히덕 거렸고, 밤에는 정사를 나누었다는 것.'

법정에서 설명할 수 없는 뫼르소의 심정은 이랬다.

'죽음 가까이에서 어머니는 해방감을 느끼며, 다시 살아 볼 마음이 생겼을 것이다. 아무도 어머니의 죽음을 슬퍼할 권리는 없는 것.'

사형 집행 전날, 뫼르소는 감옥 창살 너머에서 풍겨 오는 별, 흙, 소금 냄새를 맡으며 생애 처음으로 자신이 대우주의 품 속에 안기는 충만감을 느낀다. 삶의 부조리는 우리가 반항하고 뛰어넘으려 해도 소멸될 수 없다는 것.

이십 대에 '이방인'을 만났을 때, '뫼르소'의 판사나 배심원처럼 그가 소름끼쳤다. 그 소설책 자체가 정나미가 떨어져 마지막 장을 읽었을 때 내팽개 쳐 버렸다.

요즘 나는 다시 옛날 책들을 꼭꼭 씹어가며 읽는다. 좋은 글들일수록 문장은 쉽지만 그 속에 담긴 깊고도 위대한 세계관과 삶에 대한 눈썰미가 대단해서이다. 얼마전 '이방인'을 읽고 그 책을 가슴에 품었다. 우리가 설명할 수 없어 답답해 하던 삶의 모순과 부조리, 허망함이 얇은 책 속에 모두 담겨 있었다. 카뮈는 설명할 수도 없고 합리적이지도 않은 무의미한 인간들의 행동을 유리 구슬 같은 눈길로 본다. 그의 눈에 물기는 없다. 그래서 인간은 고독할 수 밖에 없고, 우리 앞에 펼쳐지는 일상은 무척 평온한데 참으로 낯설다. 한 편에서는 무슨 음모가 꾸며져서 옥죄어 오는데 빠져 나올 수가 없다. 삶은 설명할 수 있는 일보다 설명할 수 없는 일이 더 많다.

지난 3월 아본델 칼리지에서 발생했던 정군 사건(많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정군 이름과 사진이 공개 됐었다)의 정군에게 18개월의 징역형이 떨어졌다. 그 당시 한인 커뮤니티는 조금 들썩거리다가 뫼르소처럼 입 다물게 되었다.

정군 사건이 법정에서 어떻게 다루어지고 있는지 모른다. 아마 고매하고 냉정하신 법조인들께서 일말의 의구심도 없이 법집행을 하려고 많은 고뇌를 했을 것이다. 한인 관계자 여러분도 발품을 아끼지 않으며 다방면으로 최선의 결과를 위해 노력했을 것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17세의 정군이 명확히 설명해낼 수 있는 일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을 것이라는 것이다.

9월 24일, '피해 교사가 인종차별적 발언으로 범행을 유발했다고 볼 수 없다'는 판결을 우리 모두는 구경꾼처럼 바라보았다. 그렇다면 그런거지 뭘 더 어떻게 할 수 있겠는가? 치명적인 내상(內傷)이 간과되는 부조리함이란!

당시 정군이 찌른 칼(가위라는 설도 있었다)에 치명적이지 않은 상처를 입은 데이브 워렌에 대한 여러 얘기들은 더이상 들리지 않는다. 왜 꼭 데이브 워렌이었을까? 결국 퍼즐은 유학생활에 적응하지 못한 문제아의 소행으로, 1942년 뫼르소의 재판처럼 관찰자 시점으로 완성돼 가고 있다. 카뮈는 소설가라기 보다는 삶의 본질을 꿰뚫는 선지자라는 생각에 경외감이 들 정도다.

이런 가정은 어떤가. 워렌이 남북한 문제를 들먹였다는 몇 줄 기사에 의거한 것이다.

나에게도 아들이 있다. 아들은 조국에 무슨 문제가 발생하면 나보다 훨씬 걱정한다. 나에겐 익숙한 국회의원들의 몸싸움도 참으로 창피해 한다. 조국에 대한 의협심과 애국심이 충만하다. 어린 시절 이민 왔음에도 그렇다. 반면 본인에게 일어난 불합리한 일들은 별 일 아닌 데 뭘 그러냐면서 날 위로한다. 정군도 자신이 받은 설명할 수 없는 모욕적인 언사나 눈길, 묘한 분위기는 사소하게 넘겼지만, 국가에 대한 모욕은 참을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조국애와 의협심에 불타는 십 대 청소년이지 않은가. 그렇다고 그의 행동이 정당화된다는 의미는 아니다. 내가 유추해 볼 수 있는 것은 단지 이것 뿐이다.나는 구경꾼에 불과하므로.

우리가 아이들에게 가르쳐야 할 것은 영어가 아니다. 우리가 유학생을 바라봐야 하는 시선은 돈벌이 대상이 아니다. 삶 곳곳에 포진되어 있는 부조리하고 비합리적인 지뢰밭을 어떻게 피해가야 하는가? 그 지혜를 가르치고 보호해주고 함께 길을 떠나는 일이다.

<3월 24일자 컬럼 '도대체 누가'에 이어 쓴 글입니다. 지난 컬럼은 www.nzkoreapost.com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 뉴질랜드 코리아포스트(http://www.koreapost.co.nz),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