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8] 밤 나들이

[338] 밤 나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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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김영나씨는 성균관 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고, 잡지사 기자와 방송작가 생활을 했다. 뉴질랜드 이민 7년차이며, 아이를 키우는 주부로 한국어를 가르치는 선생으로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다. 서글프고 불행하다는 생각이 드는 날을 못견뎌하며 이번 호부터 본지에 행복의 파랑새를 찾아 교민 여러분들과 함께 나누고자 한다.>


  '밤이 깊으면 아침이 멀지 않았다. 불행한 시간을 철저히 인내하라. 불행한 시간에 대한 사색없이는 행복 또한 존재하지 않는다.’

   행복이란 무엇인가?
  많은 철학자와 선각자들이 ‘행복'의 조건을 찾아 헤맸지만 별로 신통한 해답을 내놓지 못했다. 오히려 행복의 실체를 기대하는 대중 앞에 불행을 철저히 음미하라고 주문한다. 철학자 쇼펜하우어는 ‘행복한 생활은 위험한 허상(虛像)'이라고까지 말했다.

  요즘 행복론의 대세는 ‘행복은 순전히 네 피부 아래서 일어나는 일’ 즉 ‘모든 일은 네 마음먹기 달렸다’이다. 슬그머니 책임을 회피하는 책임전가형이다. 위정자들이 좋아할 얘기다. 과연 그럴까?

  어떤 사연으로든 이국만리 타국 땅에 뿌리를 내려야 하는 이민자로서는 ‘마음'이 보통 유연하면서도 단단하지 않는 한 행복을 느끼기가 쉽지 않을 듯 하다. 특히 얼마 전부터는 사방을 둘러보아도 힘들고 어려운 교민들의 한탄 소리가 들릴 뿐---, 행복의 파랑새는 너무 멀리 날아가 버린 듯하다. 이럴 때 일수록 교민 상호간에 정보를 교환하고 진심으로 도와주고(사기치지 말고) 대한민국 정부와 이 곳 뉴질랜드 정부의 정책이 우리에게 유리해지도록 목소리를 높여야 하지 않을까? 행복이 순전히 개인의 마음먹기 달렸다는 말은 인간이 사회적 동물임을 망각한 ‘음모론'이 아닐 수 없다.

  지난 30일, 봉준호감독의 ‘괴물(The Host)'이 sky city 극장에서 상영되었다. 영화 ‘괴물'은 행복이 개인 혼자의 힘으로는 지키기 어려운 영역임을 여실히 보여 주고 있다. 행복은 개인과 국가는 물론, 글로벌 시대에 걸맞게 온 지구인이 함께 동참해야 지킬 수 있는 일임을 역설하고 있다. 7백석 남짓한 객석을 꽉 채운 다국적 관객들은 재치 넘치는 대사에 웃고, 죽음을 불사한 가족애에 가슴이 찡했으며, 숨을 멈출 듯 고조된 긴장감 속에 외마디 비명을 지르곤 했다. 뉴욕 타임즈지에서는 ‘괴물'이 스티븐 스필버그의 ‘우주전쟁'에 대적할 만한 스릴과 긴장감이 있다고  평했다. 그뿐이랴! 영화 전반에 깔려 있는 무능하고 부패한 정부, 국제 정의를 앞세우며 간섭하는 미국이라는 국가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은 여느 괴물 영화와는 차별화된 독보적인 우위를 보여주고 있다.

  2006 오클랜드 국제 영화제 관계자는 영화가 시작되기 전“칸느에서 방금 도착한 따끈따끈한, 올해의 주목받는 영화”라는 말로 ‘괴물'을 소개했다. 2006 오클랜드 국제 영화제의 팜플렛에도 겉장을 넘기자마자 ‘괴물'이 소개되어 있다. 다른 영화들이 우표 크기의 영화 스틸 사진과 간단한 영화 소개가 곁들여진 데 비해 봉준호 감독의 ‘괴물'은 엽서 크기의 사진과 반페이지도 넘는 영화 소개가 곁들여져 있다.

  2006 오클랜드 국제영화제의 피날레를 장식한 ‘괴물'은 관객들의 박수 갈채 속에 통쾌, 유쾌하게 막을 내렸다. 그리고 나는 엔딩 크레딧이 다 올라가고 마지막으로 괴물의 위협적인 함성이 ‘와웅’튀쳐 나올 때 마지막으로 한 번 더 크게 놀래 주고 서서히 극장을 나왔다.밤 11시가 다 되어서였다.

  이민자로서 살면서 가장 반갑고 행복한 일은 이곳에서 우리 문화를 접할 때이다. 그래서 좀처럼 해떨어지면 외출을 하지 않는 생활 속에서도 가끔 밤나들이를 즐긴다. 2년 전 쯤인가, 황병기 선생의 가야금 연주를 오클랜드 시내 성당에서, 김기덕 감독의 ‘봄,여름,가을,겨울---’ 을 오페라 극장에서 관람했을 때 그 여운이 나를 며칠 동안이나 행복하게 해주었다.

‘괴물'은 2시간 남짓  조였다 풀었다 하면서 묵은 체증을 쑥 내려가게 해주었다. 그래서인지 늦은 밤나들이에서 돌아오는 나의 발걸음이 새털처럼 가벼웠다. 영화감독을 꿈꾸는 아들과 함께 ‘괴물'에 대해 토론하며 차를 몰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는  봄비처럼 촉촉히 비가 내렸다. 달디 단 단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