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9] 한국인 금융시장의 미래를 연다. - 리차드 윤
0 개
7,066
26/07/2008. 15:40
KoreaTimes (125.♡.179.126)
지난 1월, The National Bank of New Zealand에 한국인만을 위한 독립적인 은행업무를 수행할 "한국인 은행업무본부 (the Korean Bank Unit)"가 생긴다는 반가운 소식이 들려 왔다.
한국인 만을 위한 독립적인 금융서비스를 지원하게 될 이 본부를 이끌고 있는 사람은 다름 아닌 前, 웨스트팩 은행, 아시안 팀 매니저 리차드 윤(46)씨. 웨스트팩 은행 타카푸나 지점에서 13여 년간 근무하며, 아시안 금용 업무를 훌륭하게 수행해오던 리차드 윤씨는 현재 뉴질랜드에서 가장 오래된 한국인 은행원 중 한 사람이다. the National Bank 시티 본점에서 만난 그는 새로 창설될 본부의 보금자리가 될 커다란 사무실과 한국인 직원들을 소개하며 시종일관 의욕에 넘친 모습이었다.
호주 유학시절부터 뉴질랜드에 오기까지
1992년, 그는 뉴질랜드에 첫 발을 내디뎠지만 외국 생활이 처음은 아니었다. 한국에서 대학을 졸업하던 바로 다음날, 그는 전공분야를 좀 더 공부하기 위해 한치의 주저함도 없이 호주 유학 길에 올랐다. 88년, 시드니에서 마케팅과 경제학 단기과정을 이수한 후, 맥콰리 대학 (Macquarie University) 대학원의 응용 금융학 석사 (master of applied finance)과정에 도전했다. 수업방식이 한국과 다른 Tutorial (토론식 수업) 방식이라, 전체 유학생 20명 중 12명이 중도에 포기할 정도로 쉽지 않은 과정이었다.
어려운 학위 취득을 마친 후, 취업을 위해 한국으로 돌아온 윤씨는 생각지도 못한 난관에 봉착하게 된다. 그의 전공분야인 '선물 옵션 스왑' 부분을 활용할 수 있는 파생 금융 상품시장이 한국에는 전혀 형성되어 있지 않았던 것. 금융 시장을 한 단계 발전시켜 보겠다는 그의 포부는 보수적인 한국 시장에선 너무 앞서가는 것이었고, 심지어는 학위 조차 제대로 인정해주지 않았다. 오히려 '너무 많이 배운 것'이 흠이었다. 그 당시 은행장으로 계시던 삼촌조차 취업의 기회를 주지 않자, 그는 새로운 기회를 찾아 뉴질랜드 행을 결심하게 된다. 돌이켜 생각하면 삼촌의 단호한 거절이 그에게 더 큰 기회를 주었다며, 지금은 오히려 감사한 마음이다.
사람 일은 모르는 거니까...
뉴질랜드로 건너온 후에도 일자리를 구하는 건 생각만큼 쉽지 않았다. 36군데 지원서를 보냈으나 모두 번번히 거절당했다. 거절 이유는 바로 "over qualified" (학력/능력 과잉). 한국에서 겪었던 것과 비슷한 일이 되풀이 되자 황당할 뿐이었다. 하지만 그는 좌절하지 않고, 그 때 받은 거부 레터를 모조리 모아, 읽고 또 읽으며 자신의 문제점을 분석했다고 한다. 드디어 웨스트팩 은행에서 입사의 기회를 잡았짐나 고용의 조건은 6개월 한정이라는 계약직으로 入行을 시작했다. 한국인과 일본인 시장에 확신이 없다는 것이 그를 계약직으로 고용한 이유였다. 하지만, 그는 불과 1개월도 안 돼 정식직원으로 채용되었고 타카푸나 지점으로 발령. 13년간 한 자리에서 꾸준히 근무할 수 있었다. 물론, 더 좋은 조건을 제시하는 스카웃 제의도 여러 번 있었다. 하지만 그는 당장의 이익을 쫓기보다, 좀 더 큰 그림을 그리며 한자리에서 꾸준히 실력을 쌓는 방법을 택했다. 그 결과, 그는 아시아인들이 간혹 느낀다는 인종차별이나 문화적 갈등을 전혀 느끼지 못하고 직장생활을 해 나갈 수 있었고, 오히려 '후한 대접을 받았다.'고 말할 수 있게 됐다.
이 과정에서 그가 깨달은 건, '인생에 있어서 밑그림을 크게 그리면, 작은 유혹에 흔들리지 않을 수 있다.'는 사실이다. "사람 일은 지나 봐야 아는 법이죠. 지금 당장 힘들더라도 꾸준히 참고 노력하다보면 언젠가 몇 배로 좋은 결과가 나에게 돌아옵니다. 특히 이민자로서 나는 이 생각을 항상 마음속에 새기고 살았습니다."
새로운 도약의 기회를 맞다.
이렇듯 강직하게 한 우물을 팠던 그가 전직을 결심했다는 사실은 놀라운 사건이었다. The National Bank의 스카웃 제안이 있었을 때 그가 요구한 조건은 단 하나. 한국인 전용 뱅킹 서비스를 도입해 달라는 것이었다. 아직까지 아시안 은행업무 본수에 속해있던 한국인 담당팀을 하나의 제대로 된 독립 은행 업무본부로 만드는 것은 오래전부터 그가 꿈꿔 오던 계획 중 하나였다. 검증된 인재가 필요했던 내셔날 뱅크는 그 요구조건을 흔쾌히 받아들였고, 그는 단 1달러의 임금협상도 하지 않고 오직 그 조건 하나만으로 13년 만에 전직을 결심했다.
그가 한국인 은행 업무 본부의 필요성을 역설하는 이유는 단지 한국인의 자존심을 세우기 위해서만은 아니다. 그는 한국인 시장의 가능성을 매우 높게 평가하고 있고, 내셔날 뱅크도 이 사실을 인정하고 있다고 말했다. 정체된 교민시장에 대한 의견을 묻자 그는 단호히 "일시적인 현상이다."라고 말한다. 또, "한국인의 대규모 투자 문의가 꾸준히 들어오고 있고, 투자규모 또한 5,000만 달러에서 1억 달러로 큰 편이다."며 한국인 금융 시장은 유래없는 장미빛이라고 단언했다.
은행들 또한 한국인의 금융 신뢰도를 높게 평가하고 있다고 말했다. "웨스트팩 은행의 경우 한국인과의 대출거래에서 단 1달러의 부실채권이 없었어요. 그러니 은행에서 얼마나 한국인들을 높게 평가하겠어요?" 라고 말하는 그의 얼굴엔 자긍심이 엿보인다.
그래도 일할 수 있을 때가 행복
"결혼을 스물 여덟 살에 했어요. 일찍 시집와서 유학 생활하는 남편 뒷바라지 하느라, 아내가 고생이 많았죠." 현재, form7에 재학 중인 큰딸과 intermediate 과정을 시작하는 둘째 딸, 그리고 아내와 함께 생활하는 그는 "둘째가 좀 늦었죠? 큰딸이 너무 심심해 해서... "하며 쑥스러운 미소를 짓는다. 가정 일에 관해서는 일체 관여하지 않고 모두 부인에게 맡긴다는 그는, 대신 '주말엔 꼭 외식하기'를 규칙으로 정했다고 한다. 한 주동안 식구들 뒷바라지로 지친 아내를 위해 그가 해 줄 수 있는 작은 배려다.
신규 본부의 창설 준비로 그는 요즘 눈 코 뜰새 없이 바쁘다. 사람을 만나는 일에 많이 시간을 할애한다는 그는 오전 6시 30분에 기상해, 밤 11시 정도가 돼야 비로소 집에 들어갈 수 있다. 때문에, 토요일은 꼭 정오까지 숙면을 취해 부족한 잠을 보충한다.
몸은 힘들지만 그는 좋아하는 일에 열정을 바칠 수 있는 터전이 있어 행복하다. 힘들고 지칠 때나, 가끔 교만한 마음이 들 때 그가 꼭 하는 일은 바로 '14년 전 모아둔 취업 거절 레터를 펼쳐 보는 것'. 일 할 기회조차 찾을 수 없던 시절, 번번히 거절당했던 36장의 거절레터를 펼쳐 보며 그는 일할 수 있는 현재에 감사하고, 초심을 잃지 않을 수 있다고 한다.
"내셔날 뱅크에서 나는 헤드라는 직함을 받았다. 헤드란 여러 명의 매니저를 거느린다는 의미다. 앞으로 뉴질랜드 전 지역에 지점 영업망을 구축해서 한국인 금융시장 규모를 점점 확대할 계획이다." 라며 그는 앞으로의 포부를 밝혔다. 또한, 현재 금융권에 종사하고 있는 사람이나 예비은행원들이 조언이나 도움을 청할 일이 있다면 언제든지 찾아오라며, "훌륭한 한국인 금융인들이 많이 나와 줬으면 좋겠고, 선배로서 견인차 역할을 하고 싶다."는 말도 잊지 않았다.
취재/글 : 이연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