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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7/2008. 13:07 KoreaTimes (125.♡.179.126)
-KTOC (재뉴 한인 인 바운드 여행업 협회) 회장 강근영-
"어머니! 뉴질랜드 가서 한 3개월만 놀다 올게요. 너무 걱정 마시고 건강 하세요!" 집을 떠나며 먼 이별의 예감이었을까? 아무런 이유 없이 그냥 눈물이 나서 감추고 또 감추며 썬 글라스를 푹 뒤집어 쓴 채 등을 돌리고 공항 게이트를 향해 뛰어든 강근영씨. 오클랜드 공항에 도착 했을 때 그는 짧게 자른 스포츠머리에 청재킷과 청바지 그리고 커다란 빨간 배낭을 짊어지고 닥쳐올 미래에 대한 걱정도 모른 채 그저 마중 나올 사람에 대한 반가움만 가득 찼다. 그러다 어느덧 두 손의 손가락 으로도 다 못 세는 횟수로 15년이라는 숫자를 세월의 무게에 달고 이 곳 뉴질 랜드에 여전히 서있다.
뉴질랜드로 이민을 온 사람들의 이유는 천차만별 이다. 수많은 이유들 중 강근영씨는 “남 눈치 안보고 내가 능력 껏 일한 만큼 인정받고 평등함과 낙하산 없는 세상에서 살고 싶어서 뉴질랜드로 왔어요”라며 인터뷰에 응했다. 뉴질랜드로 오기 전 강씨는 한국에서 산재환자들의 고충, 그리고 사람의 몸을 돈과 시간으로 평가하는 노사들과 사회에 줄을 서야 하는 고리들의 끝없는 괴롭힘들을 많이 보게 되었다고 한다. 이런 세상을 향한 복잡한 그림을 머릿속에 그리던 시기에 그는 뉴질랜드의 한 지인으로부터 한국이 그렇게 답답한 세상이라 여겨지면 다른 공간에서 호흡을 크게 해 보라는 전화를 받고 무작정 뉴질랜드로 향했다. 강씨는 뉴질랜드에서 새 인생을 열도록 도와주신 이 분에게 감사하고 또 감사 드린다며 잠시 옛 추억에 잠긴다.
▶ 식당 아르바이트에서 여행 가이드까지
그는 한국 식당에 가면 아르바이트생을 부르기 보다는 직접 메뉴판을 들고 오거나 반찬을 가져오는 습관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그 이유는 바로 이 곳의 시작이 식당 아르바이트였기 때문이다. 지금은 추억이 되어 버린 한 식당, 현재 병마와 싸우시는 이 식당의 홍사장님께 지면으로 힘내시라고 모든 여행종사자 분들을 대신해서 전하고 싶다고 말한다. 강씨가 이 곳에 정착하게 된 가장 큰 동기는 우연한 사건으로부터 라고 한다. 그것은 갑자기 주어진 아르바이트! 여행사 가이드는 아니지만 여행사 가이드의 보조였다. 즉, 공항에서 일을 끝내고 다른 미팅 시간이 겹친 한 가이드 분을 위해 약 30분 정도 시간 메우는 아르바이트 였던 것. 손님들에게 ‘옷 갈아 입으세요, 환전 하세요, 카메라 필름 챙기 세요.'라는 말을 외치고, 담당 가이드 분이 오시면 이 손님들을 인계해 드리는 일이었다. 그런데 여행사 가이드 보조 아르바이트를 하던 중 1시간이 지나도 담당 가이드가 나타나질 않았다. 손님들이 빨리 가자고 재촉 하는 바로 그 때 담당 가이드 분이 나타나서 지금 끝내려는 다른 팀의 비행기가 지연 되는 바람에 이 팀을 맡을 수가 없으니 대신 가이드를 해주면 안 되겠느냐고. 그는 엄청난 소용돌이가 몰아칠 그 상황을 생각지도 않고 겁 없이 "예" 라는 대답으로 그 팀을 데리고 공항을 나왔다. 그 상황이 어쩌면 우연을 가장한 자신의 용기가 넘어선 모험심과 도박이었을지도 모른다고 강씨는 말한다. 아무 것도 모르는 초보 가이드 강근영. 결국 그는 손님에게 긴장을 풀라는 말로 시작해서 자신감 있게 2박3일을 50곡의 노래와 함께 했다고 한다. 우여곡절도 많고 실수도 많았던 첫 가이드. 이 황당한 사건을 계기로 강씨는 여행사 일을 본격적으로 배우게 되었고 꾸준한 노력 끝에 인정받는 프로가 될 수 되었다고 말한다.
▶ 태어나서 처음으로 부모님께 용돈을 드리다
여행업에서 일을 하며 번 돈으로 한국에 계시는 부모님께 태어나서 처음으로 용돈을 송금했는데 일주일 후 어머님은 대성 통곡하는 목소리로 전화를 하셨다고 한다. 그 내용은 "너 이 돈 어디서 훔쳤니!" 어머님은 ‘평생 그가 돈 벌어 용돈 주겠나.’라는 생각을 하신 모양이라고 한다. 그런 그가 지금은 작던 크던 이 곳 재뉴 한인 인 바운드 연합회 모임인 KTOC의 회장이며 직접 이 곳에서 여행사를 운영하는 자기 색깔을 확실히 만든 사람으로 서 있다. 최근 KTOC 단체의 여행업 정상화를 위한 끝없는 노력과 함께 모든 여행인들의 노력으로 변화의 몸부림을 보이고 있다고 말하는 그는 뉴질랜드라는 관광 산업국가에서 교민들의 여행업이 정말 자랑스럽고 현지인들로부터 대우 받아 교민사회의 직업군으로 인정받고 정착시켜 다음 세대에게 예쁘게 포장해서 물려주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또한 이제는 여행업 관련 분들에 대한 오해를 접고 구조적인 문제의 근원인 한국 여행사 들로부터 힘들고 지쳐 하는 우리 교민 여행사의 편이 되어 든든히 지켜 주시기를 당부한다. 강씨는 IMF 시절 여행과 유학 사업이 문을 닫았던 그 시기를 기억하시는 분들은 관광과 유학 사업이 한국과 연계해서 뉴질랜드 교민경제에 크게 기여한 소중한 사업이라고 말한다. 생각해 보면 여행업은 이 나라 호텔이나 관광지 버스 등을 이용하며 그들의 여행 사업에 도움이 되므로 여행업은 키위 사회에서 존경 받는 직종임이 틀림없다고 덧붙인다. 그는 처음 이 곳에서 생활하며 우리 누구나 겪는 언어적인 문제로 마음 상해본적이 많다고 한다. 특히 관광객들과 함께 여행을 하던 중 강씨가 잘못하지 않았는데도 언어적인 문제로 뒤로 밀리거나 조롱 및 수군거림을 당한 적도 많다고……. 많은 사람들이 경험했을 법한 상황 들이다. 지금도 자랑할만한 영어를 쓰는 그는 아니라지만 일하는데 유용한 한 가지 방법을 살짝 귀띔해준다. “상대방에게 내가 비즈니스 를 주는 관계가 되면 상대방이 일본인, 중국인, 키위 누구든 내 말을 알아들으려고 귀를 기울이고 심지어 한국말을 한 두 개씩 배워 오지 않겠습니까? 그러기 때문에 일을 하면서 언어의 불편함은 크게 줄어요.” 혹 앞으로 여행업에 종사하기 원하는 우리 젊은 세대들을 위해 조언을 하자면, 지금의 과도기적인 상황들이 계속해서 근본적인 구조 변화와 함께 진행 중 이기에 보다 안정된 직업으로 자리매김 되는 시기를 위해 차곡차곡 눈으로 보고 귀로 들은 지식과 다른 전문적인 코스를 밟아 나아가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제는 태양이 지는 어두운 면만이 아니라 태양이 뜨는 반대편의 밝음도 역시 긍정적으로 바라봐 주신다면 교민자녀들을 위한 멋진 직업군이 하루 빨리 이루어 질 것이라고 말한다.
그에게 이 곳에서 살아가는 최고의 에너지는 바로 가족이었다. 그는 ‘내 팔자’라는 단어를 쓰며 횟수로 14년이 넘는 이 곳 뉴질랜드에서 “12년 반 동안의 세월은 한국에 있는 가족의 뒷바라지를 한 시절”이라고 말한다. IMF때 부모님의 사업 실패에 대한 모든 뒷감당, 형과 여동생 둘의 장가, 시집 보내기, 아버님의 갑작스런 병환에 대한 봉양, 꼭 얼마 전에 나왔던 드라마 ‘쩐의 전쟁’이 자기의 삶보다는 가벼운 스토리 같다고 농담 섞인 표현을 하기도 한다. 그 세월 속에서 그는 꿈을 세우고 접는 반복된 삶으로 심장과 가슴은 다 타 버렸지만, 지금은 그 거름 위에서 더 강한 새싹이 태어났기에 지금 사는 것 자체가 행복이라 말한다. 무엇보다 이 곳에 와서 가족에 대한 소중함을 처음으로 깨달았고, 지금 이 곳에서 수많은 사람을 아는 것 만으로라도 강씨는 가진 것이 많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