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정으로 아름다운 삶을 살아가는 교민 있다. ‘코리아 포스트’ 칼럼 리스트로 16년째 글을 기고 하고 있는 교민 수필가 이다. 여든 살의 나이지만 아직 청춘이라며 배움에 손길을 놓지 않고 아름답게 삶을 도전하며 살아가고 있는 오소영 씨를 만나 보았다.
코리아포스트에 칼럼 리스트로 글을 쓰기 시작 한지 벌써 16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그 세월처럼 본인 나이도 이제 여든 살이 되어 버렸다. 하지만 아직도 배워야 할 것들과 해야 할 일들이 남아 있다. 우선 코리아포스트에 기고했던 16년의 기록을 한 권의 책으로 준비 하고 있다. 몇 년 전 지금에 계획을 시도 했지만 엄청난 비용부담이 앞길을 막았다. 하지만 더 이상은 미룰 수 없어서 용기를 내었다. 책 제목은 <언니가 오셨네> 라고 정했지만 부제로 <뉴질랜드 삶의 오솔길을 걸으며> 라고 생각 하고 있다. 16년전의 글과 지금의 글을 하나로 묶는 다는 것이 생각 보다 쉽지는 않았다. 그때의 환경과 지금의 생각과 환경이 틀려서 인지 작업을 하면서 많은 생각에 잠기게 되었다. 내가 쓴 과거의 글을 보면서 16년전 나의 생각과 환경을 다시 한번 생각 해보는 계기가 되었다. 덕분에 과거의 생각에 잠겨 지난날 들에 아름다운 일들을 생각 하면서 오늘도 글 쓰는 작업을 하면서 얼굴에 미소가 번지고 있다. 글을 쓴다는 것은 참 어려운 일이지만 이것처럼 집중이 잘 되는 것도 없는 것 같다.
삶을 기록 하면서 재미 느껴
글을 쓰고 있지만 문학공부를 특별히 한 경험은 없는것 같다. 사춘기를 6.25 동란으로 빼앗기고 피난지 몇 곳에서 학교수업을 마쳤다. 일찍이 직장생활을 하면서 틈틈이 삶을 기록을 하는 것이 취미처럼 시작이 된 것 같다. 결혼 후 전업주부로 살면서 삶의 이모저모를 그냥 놓치지 않고 글로 기록을 남겼다. 그 글들을 신문사나 방송국으로 보내면 채택되어 고료도 받고 선물도 받으니 너무 재미있었다. 그 동안 글을 쓰면서 작은 상도 몇 개 받았지만 그럴듯한 상은 1983년 KBS 이산가족 찾기, 이북5도청에서 실시한 백일장에서 우수상을 받았다. 등단을 하는 것은 사실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냥 쓰고 싶은 대로 쓰면 된다는 고집이었다. 하지만 1997년 자의 반 타의 반으로 ‘한맥문학’을 통해 정식 등단을 했다. 그 다음해 1998년 <서울시 공모>, <서울 이야기>에서 최우수상을 수상했다. 그리고 바로 뉴질랜드에 들어왔다. 새로운 나라에 오니 보고 쓸 것 들이 너무 많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글을 쓰면서 적응을 하고 외로움을 견뎌낼 수 있었던 것 같다. 나는 스스로 글을 잘 쓴다는 생각은 없다. 전문 지식도 따로 없으니 그져 본대로 느끼는 것들을 썼을 뿐이다. 아마도 그런 자연스러운 것들이 꾸밈 없는 소박한 글이 되었나 보다.
재외동포문학상 공모전 당선
무식하면 용감하다는 말이 있다. 도전 정신에 강한 사람이라고 할까? 엄밀히 말해서 내 작품을 평가 받고 싶음의 작용일 것이다. 뉴질랜드에 와서 생활을 하면서 처음 대하는 이웃들의 모습이 좋았다. 아이들이 외국에 나와 어떻게 살아가는지 불안했는데 시골 인심처럼 더불어 사는 게 참 따뜻하게 느껴졌다. 어린 손녀가 이웃 아저씨의 팔에 안겨서 재롱을 부렸다. 고국에서도 못 느낀 이국의 정서가 가슴에 전해져 오니 글쟁이가 그걸 그냥 놓칠 수가 없었다. 여기서 그걸 처음 발표했을 때의 생각이 난다. 어느 날 성당 구역 모임에 참석했는데 어느 분이 그 책을 내 보이며 칭찬을 하셨다. 젊은 분에게 낭독까지 시키며 나를 기쁘게 띄어주셨다. 해가 바뀌고 2000년 재외동포문학상 공모 가 있는걸 알고 서슴지 않고 그 작품을 냈다. <참으로 괜찮은 이웃과> 이 작품이 가작으로 당선 된 것이다.
‘한맥문학가’ 상, 수상에 대해서
등단한지는 얼마 되지 않았지만 그 동안 써놓은 작품들이 많이 있다는 것이 참고가 되었다. 여기 저기 산발적으로 발표한 작품들도 가득이었다. 가장 최근에 서울시에서 발표한 <서울 이야기> 에서 최우수상을 받은 것이 크게 작용한 것 같다. 고 건 씨가 시장으로 있을 때 서울을 세계에 알리려는 의도였다고 생각한다. 내국인 부문과 외국인 부문을 따로 해서 공모했는데 외국인 응모자도 많았고 젊은이들이 많이 응모했었다. 내가 나고 자란 곳이 마포였다. 한강변에서 놀던 이야기가 진작에 있었다. 어느 날 공모 포스터를 전철에서 발견하고 그 작품을 바로 보냈다. 1998년도 말에 그래서 두 가지 상을 받게 되고 내 생애 최고의 해가 되었던 것 같다. 운이 좋았던 것 같다.
합창단원으로 또 다른 도전
무지개 경노대학에 나가는 친구에게서 합창단이 생겼으니 꼭 나오라는 권유가 있었다. 노래는 자신은 없었지만 보람 있을 것 같은 생각에 입단을 결정 했다. 하지만 건강 문제가 생겼다. 몇 년 동안 이명이 낫질 않더니 한쪽 귀가 난청으로 막혀버렸기 때문이다. 지휘자의 설명을 못 듣고 연습을 하려니 힘들어 몇 번이나 그만 두려고 했었다. 그 고충을 충분히 알고 모른 척 이해 해주시는 단장님 덕에 이젠 총무라는 중책까지 맡아 살림꾼으로 더 열심으로 하고 있다. 이 나이에 큰 무대에서 공연을 한다는 것 은 대단한 경험이고 보람 있는 일이다. 20여명의 단원이 한 목소리를 내며 연습을하다 보니 이젠 한 가족 자매처럼 서로를 다독이며 살아간다. 주름진 얼굴에 은발이 휘날리지만 무대에 올라서면 모두가 20대 청춘으로 열정을 뿜어낸다. 연습 또 연습 수요일의 한 시간이 그 노래 속에 녹아있다. 오는 11월 20일 7회 공연을 앞두고 목소리를 모으는 요즘, 아픈 사람이 생길까 봐 노심초사다. 몸이 따라주지 않아 본의 아니게 물러서는 분들이 있기 때문이다. 작년 시드니 해외 공연은 평생 잊을 수 없는 추억으로 단원들 모두의 가슴에 아름다운 꽃을 피웠다. 나이를 잊고 대단한 착각 속에서 노래 을 부르는 사람들, 그들 노래에 내 목소리도 함께 한다는 사실이 너무 행복하다.
교민 학생들에게 한마디
열심히 살라는 말을 하고 싶다. 공부가 인생의 전부는 아닌 것 같다. 무슨 일이든 하고 싶은 일에 노력하고 도전하면 꿈이 이루어진다. 앞으로의 시간이 넉넉하다는 건 얼마나 큰 자산인가, 미래를 책임질 우리 학생들, 영어가 모국어인양 쓰지만 한국인의 정체성을 잃지 말라는 부탁을 꼭 하고 싶다. 우리가 어디에 살든 깊은 뿌리는 한국에 있음을 명심하기 바란다. 우리 말을 잊지 말고 글도 많이 써 주었으면 좋겠다. 몸과 마음이 건강해서 앞으로 교민사회를 빛내주는 사람들로 기대한다.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서
어쩔 수 없는 세월의 흐름에 건강이 나빠지고 있다. 특히 눈의 상태가 안 좋아 자주 안과에 가는 편이다. 하지만 여건이 허락된다면 꼭 하고 싶은 일이 있다. 두 번이나 가작으로 끝난 ‘재외동포 문학상’에 도전해 보고 싶다. 상을 떠나서 나의 한계에 도전하고 싶다. 또 하나는‘코리아포스트’에 기고했던 글이 10월에 책으로 나온다. 오랜 시간 산고를 겪고 탄생하는 책이다. 그것은 내 몸의 진액이고 분신이 기도하다. 많은 사랑을 받아야 할 텐데 걱정도 된다. 독자가 없는 책은 휴지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관심으로 아껴주신 교민 분들의 변함없는 따뜻한 사랑을 받고 싶다.
글, 사진: 김수동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