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2월 21일 뉴질랜드로 부임한 김영걸 총영사. 역대 총영사 어느 누구보다 교민들에게 더 가까이 다가가고, 교민들을 위해 더 많이 봉사하고, 노력했던 그가 2011년 2월, 3년간의 임기를 마치고 고국으로 돌아가게 된다. 지난 3년간 뉴질랜드에서 우리 곁에서 함께 했던 오클랜드 영사관의 김영걸 총영사를 만나 그 동안 걸어왔던 길과 지난 3년간의 뉴질랜드에서의 삶 등 좀 더 내면적이고 인간적인 모습을 들어보았다.
사실 인터뷰를 의뢰했을 때 김영걸 총영사는 극구 사양하였다. 새로 오는 총영사나 교민들을 위해 노력하고 있는 공관의 직원들을 인터뷰 하는 것이 어떻겠냐며, 자신을 낮추고 오히려 교민들을 위해 힘쓰고 있는 사람들을 인터뷰 해 줄 것을 부탁하였다. 하지만 코리아포스트 독자들로부터 인터뷰를 해 달라는 의뢰가 들어 왔었고, 무엇보다 교민들이 더 알고 싶어하기에 인터뷰를 한다고 설명해드리자 인터뷰에 흔쾌히 응해주셨다.
1977년 11월, 외교 통상부에 입사하여 한국 본부에서 외교정보관리 심의관으로 재직하다 재외 공관으로 발령 받은 김영걸 총영사는 인도, 미국, 브라질, 탄자니아, 뉴욕, 유엔, 영국, 일본 공사참사관을 거쳐, 이 곳 오클랜드 총영사로 부임 받았다. 6 대륙의 다양한 나라를 돌며 30년이 넘는 긴 시간을 타국에서 보낸 김영걸 총영사. 김영걸 총영사의 원래 꿈도 외교관이었을까?
경찰, 군인 등 누구나 어린 시절 여러 번 꿈이 바뀌듯, 김영걸 총영사 또한 꿈이 다양했다고 한다. 그러다 초등학교 시절부터는 항공사에 근무하였던 부친의 영향으로 항공기 조종사를 꿈꾸게 되었다고한다. 여러 나라를 돌아 다니며 하늘을 날고 싶어했던 김영걸 총영사는 결국 항공대학에 입학했고 꿈을 차곡차곡 실현해 왔으나, 공무원 시험을 같이 보자는 대학 동기의 권유로 방향이 조금 다른 길을 택하게 된다. 결국 김영걸 총영사는 외교부에 합격하여 비행기를 타고 하늘을 날아 전세계를 누비는 외교관이 되었다.
10개국이 넘는 나라를 다니며 다양한 민족을 만나고, 다양한 문화를 만난 김영걸 총영사관. 30년이 넘는 긴 세월 동안 외교관으로 살아온 그의 삶은 어떠하였을까? 김 총영사는 외교관의 직업을 한마디로‘빛과 그림자’라고 표현하였다. 그 이유인 즉슨 그림자는 항상 빛과 함께 있고 빛으로 하여금 생기므로, 외교관의 직업 또한 그림자와 같은 고생이 따르지만 보람의 빛이 항상 존재하고 함께 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대한민국이 유엔(UN) 안전보장이사회 의장국이던 당시 김 총영사는 유엔 대표부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세계 각국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유엔으로 들어와 당시 공휴일 조차 없이 야근을 거듭하며 업무를 보았던 탓에 김 총영사는 당시 건강에 무리가 오고 온갖 스트레스를 받았으나, 김 총영사는 한국 외교관으로서 세계평화에 이바지 한다는 자긍심 덕분에 버틸 수 있었다고 한다.
김영걸 총영사에게는 외교관으로써 또 한가지 잊지 못할 기억이 있다. 바로 김 총영사가 1992년 아프리카의 동부 인도양 인근에 위치한 탄자니아에 있던 시절이다. 현재 탄자니아는 한국과 약 1억불의 교역량에 이르지만 김 총영사가 탄자니아로 발령 받았을 당시만 해도 양국간의 왕래가 적고, 대사관 조차 없었다. 청사도 없이 낯선 사람들과 낯선 환경의 그 어려움 속에서 시작했지만, 그는 대한민국을 생각했다. 대한민국과 하나로 연결될 탄자니아를 생각했고, 대한민국에서 탄자니아까지 건너와 어려운 고민과 문제들을 안고 있을 교민들을 생각했다. 결국 김 총영사는 당시 탄자니아의 총영사이자 오클랜드의 초대 총영사였던 김상훈 총영사와 함께 탄자니아에 임시청사를 세우고, 그 위에 우리의 태극기를 게양했다.
“태극기를 게양하면서 동포분들과 부여잡고 눈물을 흘리며 애국가를 부르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라며 당시 상황 설명을 하던 김 총영사의 모습에는 잔잔한 미소와 함께 그 당시의 감정들이 북받쳐 오르는 듯 했다. 이어 그는 “한국과 탄자니아의 양국간의 관계가 더욱 성장하고 교민들의 생활이 안정되어 가는 것을 보면서 가슴이 따뜻해지고 흐뭇해 진다.”며 이런 것이 바로 외교관의 매력이라고 설명했다.
그렇다면 김영걸 총영사에게 2008년부터 3년 동안 머물렀던 뉴질랜드는 어떠한 나라였을까? 2008년 2월 여름에 부임한 그는 오클랜드의 상쾌한 공기와 푸른 하늘을 보면서 한번 놀랐고, 오클랜드의 교민사회를 보며 또 한번 놀랐다고 한다. 김 총영사는 “처음 오클랜드에 도착하여 부임하였을 당시 오클랜드의 활기찬 교민사회의 모습과 교민 사회의 발전을 위한 한인회와 교민단체의 헌신적인 노력에 깊은 인상을 받았습니다.”고 이야기했다.
2009년과 2010년은 특히 김영걸 총영사에게 뜻 깊은 해이다. 2009년 3월 이명박 대통령의 방문과 함께 한국과 뉴질랜드 관계가 더욱 확대되고, 동포간담회를 열어 동포들의 다양한 의견들을 전달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2010년은 한국전 60주년의 해로 해군순항훈련단 방문, 리틀엔젤스 공연등 뉴질랜드 한국전 참전용사들에게 우리의 감사의 뜻을 전달하고 국가의 이미지를 제고하는데 크게 기여했기 때문에 김총영사는 보람이 가득했던 한 해였다고 설명했다. 김 총영사는 “이 모든 것들이 뉴질랜드에 살고 있는 교민 여러분들의 도움과 협조 덕택에 이룰 수 있었다”며 감사의 뜻을 전했다.
임기 동안 교민행사를 일일히 참석하고 교민들을 찾아 다녔던 김영걸 총영사.
“민관이 협력해 나갈 때 국민이 평안해지고 국력이 배가된다!”
김영걸 총영사는 인터뷰 동안 나라의 녹을 먹는 사람으로서 민관의 교류를 우선시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며 소통을 항상 강조했다. 그래서였는지 교민들은 역대 총영사보다 김영걸 총영사에 대해‘유머가 많고, 교민들과 함께 호흡하셨던 분’이라는 이야기를 많이 한다.
‘교민들에게 친근한 이웃으로 기억되고 싶다’는 김영걸 총영사. 2월 하순이면 김 총영사는 한국으로 돌아가 본부에서 1년간 근무하게 될 예정이라고 한다. 누구보다 교민에게 가까이 다가가고 교민들과 기쁨과 고민을 나누기 위해 힘써왔던 김영걸 총영사.‘은퇴 후에도 내 힘이 필요하고 도움되는 곳에서 사는 것이 소망’이라는 그의 말처럼, 김영걸 총영사의 자상함과 나라와 민족을 사랑하는 마음이 꼭 필요한 곳에 쓰이길 바라며, 그의 앞날이 뉴질랜드의 푸른 하늘 보다 더 푸르게 번창하길 기대한다.
뉴질랜드 교민 여러분께 고국을 떠나서 언어, 제도, 풍습, 문화, 사고 방식 등 모든 것이 낯선 외국에서 생활하는 것이 결코 쉽지 않지만 이곳에 근무하면서 만났던 많은 오클랜드 거주 동포분들은 이러한 환경적 언어적 어려움을 이겨내고 짧은 이민역사에도 불구하고 본인이 있는 각 분야에서 성공적으로 잘 정착하여 뉴질랜드의 문화의 다양화와 경제 활성화에 많은 기여를 하고 있다고 평가합니다.
뉴질랜드 이민역사는 20년 안팎으로 길지는 않지만 멜리사 리 의원, 대니리 골프 선수 등 정계, 스포츠분야, 법조계, 문화 및 뉴질랜드 주요기업 등 주류사회 각 분야에 한인동포들이 활발히 진출하고 있는 것에 자부심을 느끼며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또한 지난 지방선거에는 김연주 변호사와 박성훈 코리아가든 대변인이 출마하여 안타깝게 당선되지는 못했지만 선전하였고 한인 동포들과 현지 키위사회에도 좋은 이미지를 남겼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저력을 바탕으로 동포여러분들께서는 더욱 현지 지역사회와 소통하고 협력하여 한인사회 발전을 위해 노력하여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아울러 현재 진행중에 있는 한인문화회관, 코리안 가든, 한글학교 건립에도 많은 관심과 참여와 지원을 부탁드립니다.
부임 후 지난 3년간 오클랜드 분관의 여러가지 크고 작은 업무들을 무난하게 진행해 올 수 있었던 것은 교민 여러분의 적극적인 협조와 격려 덕분으로 생각하며 이 자리를 빌어 감사 인사 올립니다. 자주 하는 말입니다만, 민관이 함께 어우러져 나아갈 때 국력은 배가 되고 국제사회에서의 리더쉽도 공고해 집니다. 앞으로도 오클랜드 분관은 동포 여러분들이 모국에 대한 자긍심을 가지고 현지 사회에 성공적으로 정착해 살아가실 수 있도록 배전의 노력을 다하겠습니다. 동포 여러분들께서도 끊임없는 성원을 보내주실 것을 당부드립니다. 교민 여러분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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