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국군으로 22년의 직장생활을 마치고 이곳 뉴질랜드에서 요리사로서 제2의 인생을 살아 가고 있는 노준식씨가 있다. 영주권을 받기 까지 6년 이라는 시간을 보냈다고 한다. 그가 겪었던 수 많은 이민생활의 시행착오를 코리아 포스트 인터뷰를 통해서 이야기 보따리를 풀었다. 과연 그는 어떻게 6년의 뉴질랜드 이민생활을 했는지, 영주권 받기 위해 어떤 방법을 시도를 했는지, 요리사 노준식씨를 만나 인터뷰 여행을 떠나보자."
Q. 뉴질랜드는 어떤 인연으로 이민을 오게 되었나요?
뉴질랜드와의 인연은 1995년 대전 군수지원단 의무대장으로 부임했을 때 군 교회 목사님과 첫 만남이 인연 고리를 만들었던 것 같습니다. 그 후 목사님과 좋은 만남은 계속 되던 중 갑작스럽게 목사님은 뉴질랜드로 떠났습니다. 저희 가족은 2003년 7월 아내와 두 아들(고2, 중2) 여름방학을 맞아 가족여행 겸 뉴질랜드에 있는 목사님과의 만남을 위하여 오클랜드 공항에 도착 했습니다. 우리가족은 모두 해외여행은 처음이라 긴장과 설레임으로 공항에 도착했습니다. 공항에 도착해서 받은 첫 느낌은 너무 작은 규모의 공항에 혹시 우리가 잘 못 내렸나 하는 우려 속에 입국절차를 마치고 목사님과의 만남이 이루어졌습니다. 목사님과 오랜만에 반가운 해후를 하게 되었고 환상적인 뉴질랜드 풍경에 반하며 2주간의 달콤한 휴가 후 저희 가족은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아내는 큰 아들을 유학을 보내기를 원하였고 우리는 곧 바로 가족회의를 열어 가족 모두가 뉴질랜드 유학에 관심이 많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저희 아내는 3개월 후 두 아들을 데리고 뉴질랜드 유학 길에 올랐고 저는 기러기 아빠의 생활로 접어들었습니다. 처음 몇 달은 해방감으로 정말 좋았습니다. 그러나 곧 혼자의 삶 자체가 고독함과 가족에 대한 그리움이 밀려들었고 이렇게 가족과 떨어져서 산다는 것은 정말 아니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휴가를 얻어 일년에 한두 차례 다녀가는 것이 전부였는데 그것도 직장의 눈치와 또한 경비가 만만치 않았습니다. 명예퇴직을 결정한 후 별다른 준비 없이 쓸데없는 자신감 하나로 2005년 5월 어느 날 뉴질랜드 생활이 시작 되었습니다.
Q. 한국에서는 어떤 일을 하셨는지요?
ROTC장교로 임관한 후(병과: 의무행정) 장기복무를 결정하고 15사단 의무대 후송 소대장을 시작으로 전 후방 근무를 하였습니다. 병과가 의무행정이라 군 병원과 군사령부 등등 상급부대에 주로 근무하였고 22년 군생활을 한 후 명예 퇴직을 했습니다. 제대 후 병원협회, 의사협회, 그리고 제약회사 영업 팀 등 많은 제의가 있었으나 가족들과 떨어져 생활한다는 것이 그렇게 바람직하지 않다는 판단아래 뉴질랜드로 오게 되었습니다.
Q. 영주권을 어렵게 받았다고 이야기 들었습니다. 어떤 방법과 어떤 노력을 했는지요?
어디서부터 이야기를 해야 될지 모르겠습니다. 가장 예민한 부분인데 저의 입장에서 준비하고 노력한 것을 바탕으로 이야기 하겠습니다.
제일 처음 뉴질랜드에서의 시행착오는 영어 공부 였습니다. 아이엘츠 6.5를 먼저 받은 후 일을 시작 할려고 했으나 영어기초가 부족했고 실력향상이 생각한 것 같이 되질 않더군요. 저의 노력이 부족하기도 했고 과거의 생각만 가지고 최선을 다하지 않은 것이 큰 실수 이었던 것 같습니다. 시험도 10번 이상 응시했지만 결과는 신통치가 못했습니다. 오히려 성적이 내려가는 상황을 맞았습니다. 그래서 방향을 바꾸었습니다. 일을 배워서 차근차근 도전 하자는 생각을 가지고 문을 두드렸지만 그렇게 순탄하지는 않았습니다. 일본식당에서 기초부터 배우며 워크비자를 신청하였고 다행이 사장님의 배려로 일을 잘 배울 수 있었습니다.
이민 컨설팅의 도움으로 워크비자는 잘 해결 되었으나 비자기간이 금방 지나갔고 다시 갱신을 거듭하는 것이 큰 스트레스 및 경제적으로도 부담이 되었습니다. 결국 컨설팅의 권유로 레벨4 쿠커리 과정을 이수하였고 그 후 부족 직업 군으로 전환하려고 했으나 한국에서 직장생활 내용이 일치가 되질 않는 다는 이민성 담당자의 말과 또 영어점수 6.5를 요구 받으면서 또 한번 시행착오를 받아 들여야 했습니다. 결국 포기 하고 말았습니다.
하늘이 노랗다는 표현을 이때 느낄 수 있었습니다. 또 다시 원점으로 돌아와서 전 에 일을 배웠던 일식당에서 모든 것을 새롭게 다시 경력을 쌓은 후 재도전 하기로 결정 하였습니다.
일을 시작하면서 처음과 달리 많은 노력을 했습니다. 첫 단계로 고객과 거래처와 친밀도를 높이기 위해 친절한 인사와 이름과 특징을 익혀 반갑게 고객을 맞이하여 주었고 많은 관심을 갖다 보니 나중에 레퍼런스를 요구했더니 기꺼이 자기 일처럼 써주었고 그것이 많은 도움이 되었던 것 같습니다. 또한 영어점수를 요구하는 이민성에 대해서는 인터뷰와 실사방문으로 변경 해줄 것을 편지와 전화로 요구하여 관철시켰습니다. 제 경험으로는 영어점수를 제출하는 것보다는 인터뷰를 하는 것이 열 배 이상 쉽게 느껴졌습니다. 영어 점수를 요구한다고 중간에 신청을 취소하는 것보다 다른 방법으로 영어를 검증 받을 수 있는 방법이 있다는 것을 이때 알았습니다. 두 번째로 주 신청자가 현재 자기가 어디쯤 가고 있는 지 또한 워크비자 신청 했을 때와 일관성 있는 서류가 되도록 워크비자 신청서류 복사하여 비교하면서 작성하는 것이 오류를 줄이는 방법이기도 했습니다. 세 번째로 배우자도 같이 파트타임으로 세금신고를 하면 나중에 영어점수 면제 요청하여 면제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저희 아내도 영어가 아직 많이 부족한 상황에서 그런 서류를 제출하여 면제받았고 경제적으로도 상당한 액수를 절약할 수 있었습니다. 마지막으로 부부관계나 자녀 관계입증 서류준비 시 결혼사진과 자녀들 성장과정을 스크랩하여 제출하면 더 이상 질문이 없게끔 한다면 시간적으로 많은 절약되지 되었습니다.
많은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저 같은 경우는 약 6년 정도 영주권 취득이 소요 되었습니다.
Q. 요즘 좋아 하는 취미 활동이 있나요?
시간이 있을 때는 가까운 골프장으로 직행하여 스트레스를 풀며 체력을 만들고 있습니다. 시간 없거나 날씨가 좋지 않을 때에는 줄넘기와 달리기 등으로 체력을 키우고 있으며 간단한 채소류를 재배(고추, 깻잎, 호박, 토마토, 아욱, 파 등등) 하면서 바쁜 시간을 보내야 다른 쓸데없는 생각을 버릴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Q. 힘들었던 점이나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 있으시면 말씀해 주세요.
힘들었던 점은 이곳에서 아내에게 일을 계속시킨 것입니다. 모든 것을 접고 일과 자녀들 그리고 남편 뒷바라지까지 일인 3역을 묵묵히 해내준 아내에게 고맙고 또한 저의 마음이 편치 않았던 것입니다. 또한 가장으로서 영주권문제를 빨리 해결하지 못해 두 아들이 대학등록금을 유학생기준으로 지출하며 경제적으로 힘들어 했습니다. 큰 아들은 금년 2월까지 영주권이 나오지 않으면 만 24세 이상으로 자기 스스로 영주권을 해결 해야 하는 좋지 않은 상황 이었는데 운 좋게도 이번에 해결 되었습니다. 아들이 말은 안 했지만 그 역시 상당히 조급해 하는 상황을 보면서 많은 고민을 했었습니다. 그러나 힘들었던 점보다는 아들들이 이곳에서 잘 적응하고 공부도 열심히 해주어서 모든 면에서 더욱 해피 해 졌습니다. 어려움 속에서 부부 사이도 더욱 돈독해졌고, 아들들도 정체성을 찾을 수 있어서 더욱 의미가 깊습니다. 막내아들은 해병대 자원 입대하여 지금 열심히 즐거운 마음으로 근무하고 있으며 금년 4월 2번째 휴가를 이곳으로.(국방부 정책) 보내줍니다.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는 일하면서 즐거운 마음으로 하여 큰 애로사항은 없었으나, 일식당 사장님은 얼굴이 동안이라 손님들이 사장님을 찾을 때 저 에게 물어 볼 때 미안하고 겸연쩍었습니다.
Q. 만약, 후배들이 뉴질랜드에서 이민을 희망한다면 어떤 조언을 해주고 싶으신가요?
뉴질랜드뿐만 아니라 전세계 어디든지 고국을 떠나 다른 나라로 이민은 정말 힘든 과정이고 인내가 필요한 것 같습니다.
저의 경우 무작정 들어와 부딪치며 하면 되겠지 하는 무모함이 시간과 비용을 효율적으로 사용할 수 없었던 점이었고 또한 시간을 가지고 천천히 급하지 않게 진행하여야 순조로운 이민이 되지 않을까 합니다. 확실한 아이템과 영어실력을 갖추어야 이곳 사회에서 적응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합니다. 또한 아내들도 어떤 기술을 습득하여 온다면 좀더 쉽지 않을 까 합니다. 그러나 저 역시 이 모든 일들을 6년 동안의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시간과 비용을 낭비 했기 때문에 감히 조언하기에 부끄럽습니다.
Q. 앞으로 더 하고 싶은 계획이 있다면?
지금까지 일식분야에서 일하였고 또한 다른 경험이 없으므로 일식 레스토랑을 경영하여 저와 같은 처지에 있는 교민들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을 줄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그리고 현지화에 성공할 수 있도록 키위사회의 본질파악의 노력을 계속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 봅니다.
Q. 마지막으로 뉴질랜드에서 열심히 살고 있는 교민 후배들에게 한마디 해주세요
희망과 용기 그리고 포기하지 않는 인내심이 여러분의 미래가 달려있다고 봅니다.
인생의 중반전을 시작하는 우리들은 또한 후반전을 준비하면서 달려 나아갈 때 분명히 앞길에 영광만이 있을 것을 확신합니다.
마지막으로 저와 같은 전철을 밟지 말고 계획된 일이 순조롭게 되길 기원하며 또한 저보다 어렵고 절박한 상황에 있는 교민 여러분들도 희망을 가지고 그 끈을 끝까지 놓지 않기를 진심으로 응원합니다.
글,사진: 김수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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