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년 전 꿈 많은 중학교 2학년 소녀가 처음 뉴질랜드 땅을 부모님과 함께 디뎠다. 당시 15세의 소녀는 지금 약학 박사로 성장해서 얼마 전 씨티에 약국을 개업 했다. 약국을 성공적으로 경영 하며 연구와 강의를 하고 싶다는 박사 이희성씨, 이민 1.5세대로 뉴질랜드에서 공부를 하면서 그는 교민 선배들이 없어서 많은 서러움과 어려움을 당했다고 한다. 특히 박사 공부를 할 때 서포트가 정말로 학생들에게 얼마나 중요한지를 느꼈다. 그래서 그녀는 교민 후배 들을 위해 아낌 없는 조언과 서포트를 하고 싶다고 한다. 혼자의 힘으로 감당했던 그녀의 학창시절의 이야기, 과연 그녀는 어떻게 뉴질랜드에서 공부를 하게 되었는지, 약학박사의 도전은 어떠했는지, 그가 걸어온 17년의 세월을 거꾸로 올라 가보자.
한국 교민들이 없는 더니든에 정착어렸을 때 그는 아빠를 무척 좋아했다고 한다. 지금에 약사라는 직업도 아빠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 어렸을 때 그녀는 아빠의 직장인 약국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고 한다. 약국에 가면 항상 비타민 씨를 주셔서 약국에 놀러 가는걸 좋아했고 약국에서 아빠가 환자 분들과 상담과 조제를 해주는걸 보면서 약사라는 직업에 흥미를 느끼게 되었다. 사실 그녀의 어렸을 때 꿈은 한의사였다. 아마도 아빠의 영향으로 약사 길을 걷는 것 같다.
중학교 2학년 때 부모님께서 뉴질랜드 이민 이야기를 했을 때 어린 마음에 외국에서 산다는 것은 정말 신기 하고 좋아서 마냥 들떠 있었다. 뉴질랜드 나라에 대해서는 양이 많고 마오리족이 있다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몰랐다. 엄마께서 뉴질랜드에서는 영어를 사용한다는 말씀에 “그러면 영어로 생각을 할 수 있게 되겠네요” 라고 말했는데 그게 부모님께서 뉴질랜드로 이민을 오게 된 가장 큰 이유 였다고 나중에 말씀 하셨다. 부모님은 한국 사람들이 많이 거주하는 살기 좋은 오클랜드와 크라이스트처치를 뒤로 하고 더니든에 정착을 했다. 가장 큰 이유는 교육 때문에 이민을 결정 하셨기 때문에 그 당시 의대, 치대, 약대가 모두 있는 오타고 대학교가 있는 더니든에 정착하는 것이 가장 좋다고 생각 하셨기 때문이다. 그때 당시에는 더니든에 한인 가정이 10가정 밖에 없어서 이웃 사촌같이 지내며 도움을 많이 받았던 기억 난다. 뉴질랜드에 처음 도착한 첫해에 눈이 많이 내렸다. 동생과 나는 평상시와 같이 걸어서 등교를 했는데, 눈이 와서 학교가 쉰다고 해서 정말 신기해 하면서 다시 집에 온 게 생각 난다. 그래서 겨울이 되면 눈이 내리기를 항상 기다렸던 기억이 난다.
끝없는 도전에 시작, 약학 박사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오타고 대학교에서 Health Sciences 1년 과정 뒤 약대 본과 (2학년)으로 입학 했다. 약대에 처음으로 입학했을 때는 공부가 많이 어려워서 힘들었다. 그래서 몇 번 포기 하고 싶었지만 우연히 약국에서 아르바이트를 시작 하면서 약대에서 배운 지식이 실전에 쓰인다는 것을 깨달은 후 다시 공부에 매진 할 수 있었다. 약대를 졸업하고 1년 동안 약국에서 인턴으로 일을 한 후 뉴질랜드 약사 협회에서 주관하는 국가 고시를 통과했다. 약국의 주임약사의 추천서를 받아서 약사 면허증을 받았을 때는 정말로 기뻤다. 약사가 되어서는 뉴질랜드 로컴 약사로 일을 하며 경력을 쌓아가던 중 같이 일하던 약대 교수님의 추천으로 오타고 대학교에서 연구원으로 일을 하게 될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연구원으로 일을 하다 보니 공부에 대한 욕심이 생겨서 대학원 공부를 하기로 결정을 했다. 그리고 오클랜드 약대에 흥미로운 프로젝트가 있다고 해서 오클랜드 대학교에서 약대 박사 과정을 시작했다. 박사 과정을 하면서 9개의 논문 발표와 20여 가지의 학술회 발표를 하며 세계 여러 나라를 다니며 존경하는 교수님들을 많이 만나면서, 학문의 길을 사랑하게 되었다. 지금은 약대에서 계속 교수님과 연구를 하며, 강의와 논문 발표를 하고 있다. 이번에 약국을 개업을 하게 되어서 연구와 약국운영을 병행하고 있다. 요즘은 19개월 된 딸과 보내는 시간이 정말로 행복 하다. 박사 과정을 공부하는 중에 결혼도 하고 아이도 출산을 해서 주위에서 걱정을 많이 했지만, 오히려 저는 시부모님과 남편의 배려와 사랑으로 더 빨리 박사 과정을 마칠 수 있었다고 생각 하며 가족들의 배려에 너무 감사 드린다.
학창시절에 추억
가장 힘들었던 기억은 뉴질랜드에 처음 왔을 때 이다. 누구나 처음 이민 생활에서 느끼는 영어에 대한 스트레스, 영어를 잘 못했던 내가 영어로 수업을 듣고, 영어로 선생님, 친구들과 의사 소통이 안되었던 정말로 힘들었던 기억이 난다. 특히 내가 다니던 고등학교는 전교에 한국 사람이 딱 4명 밖에 없었다. 그 나마 학년이 틀려서 수업 중에 못 알아 들어도 물어볼 한국 친구가 없어서 정말 답답 했다. 그래서 영어 공부를 정말로 열심히 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성격이 수줍은 편이지만 외국 친구들을 많이 만들기 위해서 학교에서 특별 활동도 많이 하고 적극적으로 친구들을 만들었다. 그래서 고등학교 친구들과 아직도 연락을 한다. 고등학교에서 특별 활동으로 합창단 피아노 반주를 했는데 저희 합창단이 시드니 오페라 하우스에서 열리는 세계 합창 대회에서 입상을 했을 때가 가장 기억에 남는 학창 시절 추억이다.
약사는 남을 위해 봉사하는 직업 약사라는 직업에 대해서 흥미를 가지고 공부를 하며, 약국에서 아르바이트를 틈틈히 하는 것을 권장 하고 싶다. 약국이 단지 약만 팔거나 조제 하는 곳이 아니라, 약국 업무가 굉장히 다양 하기 때문에 정말로 재미 있다. 약대 공부가 많이 어렵지만 약국에서 일하면서 경험을 쌓아 가면 약사라는 직업에 긍지를 느낄 수 있다. 약대 공부와 박사 공부를 하면서 힘들었을 때가 많았다. 특히 박사 공부를 할 때에 제 또래 약사들은 약국에서 높은 연봉을 받고 있는데, 저만 다시 ‘가난한’ 학생으로 돌아 가서 공부를 하려니 주위에서 많이 걱정도 많이 했다. 하지만 지금 생각 해보니 내가 선택한 길을 끝까지 지킨 게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후배님들, 지금 공부가 힘들고 인턴 과정이 힘들더라도 최선을 다해 노력을 하면 교민 사회에 도움이 되는 훌륭한 약사가 될 수 있습니다”.
글,사진 김수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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