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6] '이민 30년, 이 남자가 사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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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7/2008. 1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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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ntal health social worker, 윤기중씨의 인생철학
중년 이후의 얼굴은 그 사람의 삶을 나타내는 바로미터라는 말이 있다. 인생에 대한 자신만의 철학이 확고한 사람의 표정은 그래서 빛이 난다. 한국을 떠나 이민 생활을 시작한 지 30년에 접어든다는 윤기중씨.... 고된 역정의 흔적을 예상했던 것과는 달리, 그의 얼굴에선 아름다운 추억으로 가득 찬 여유와 향기가 묻어 난다. 지나온 세월동안 누려왔던 것들을 타인에게 베풀며 인생을 값지게 마감하고 싶다는 그... 이민자로 살아온 30년의 세월을 뒤돌아보며, 모두가 꿈꾸는 멋진 황혼을 준비하고 있는 윤기중씨를 만나 봤다.
Q. 70년대 후반은 해외여행 조차도 쉽지 않았던 시기다. 이민을 생각하시게 된 계기는 무엇이었나?
영화나 책 등을 통해 접하는 서구생활과 문화가 내가 바라는 삶의 방향과 더 잘 맞는다고 생각했다. 더구나 그 당시 한국은 '하고 싶은 것들을 할 수 있는 자유'가 없었다. 우리 집안의 정서도 보편적인 사람들에 비해 서구적인 사고와 생활 방식을 선호했던 것 같다. 지금도 핵가족 단위로 움직이는 걸 좋아하고, 자식과 부모간에도 서로의 영역을 존중한다. 내가 집에서 장남이라 당시 부모님들의 반대가 있을 법도 했지만, 크게 만류하지는 않으셨다. 여권 갖기도 무척 어려운 시절이었지만 마침 주변에는 이민을 떠나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이민을 결심한 후 처자식을 한국에 둔 채 무작정 호주로 갔다. 그 곳에서 직장을 구하고 2년 정도 후에 아내와 자식들을 불러들일 수 있었다. 그 당시 호주의 경제나 문화기반은 지금과 큰 차이가 없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한국에서 호주로 가니 별 천지에 온 것 같았다. 초기 이민 생활이 쉽지 않은 건 사실이었지만 한국이 그립거나 후회하지 않을 정도로, 새로운 사회를 배우는 재미가 많았다.
Q. 이민 1세대들이 겪는 수많은 어려움 중 하나가 바로 자녀 교육에 관한 것이다. 1세대와 1.5세대, 그리고 2세대 간에 언어적, 문화적 갈등을 겪게 되는 경우가 많은 데....
사람마다 문화와 가치관이 다르겠지만, 내 경우엔 '한국적인 사고와 가치관으로 아이들을 판단하고 가르치려 들면 오히려 아이가 그 사회에 자리를 잡아 나가는데 어려움을 당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한국인의 가장 두드러진 특성 중 하나는 모든 상황에 '획일화'된 기준을 적용해 평가한다는 것이다. 일례로 나이든 내가 스포츠카를 타고 다는 것에 대해 한국인들은 백이면 백 다 한 마디씩 한다. 반면, 이곳 키위들은 어느 한 사람도 이에 대해 언급하는 사람이 없었다. 옳다 그르다를 이야기하는 게 아니다. 우리들 중에는 다수에 속해 있지 않으면 불안 해 하거나, 개인의 다양성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데 익숙하지 못한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이민자의 자녀들은 부모를 앞지를 수 밖에 없다. 일단 언어에서 그렇고, 문화를 받아들이는 속도나 사고방식도 훨씬 유연하다. 자녀를 가르치고 길러야 하는 부모의 입장에서 이런 격차는 정말 어려운 과제가 아닐 수 없다. 아이를 도태시키거나, 현지사회에 적응하지 못하는 아이로 만들지 않으려면, 부모가 먼저 이 사회에 유연하게 적응하는 것이 필수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부모들 각자가 끊임없이 배우고 노력해서 문화적 힘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래야 아이를 뒤에서 끌어내리지 않고 앞에서 이끌어 주는 스승이 될 수 있다. 나 같은 경우는 아이에게 끼치는 영향력을 최소화 하려고 노력했다. (웃음) 그냥 두면 잘 할 아이를 괜히 부모가 나서서 저해하는 경우도 있기 때문에... 오히려 아이들에게 내가 배운 게 많다.
Q. 보통 뉴질랜드에서 호주로 이주하는 경우가 많은데, 호주에서 뉴질랜드로 재이민을 하게 된 동기는?
호주에 사는 동안 사업관계로 뉴질랜드에 올 일이 많았다. 올 때 마다 뉴질랜드가 사람살기 참 좋은 곳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곳은 인구가 적은 반면 국가 재력이 튼튼해서 나라가 사람을 '보살필 수 있는' 조건이 갖춰져 있고, 개인을 배려하는 융통성 있는 행정 구현이 가능하다. 예를 들어서, 주차단속을 할 때도 10분 정도의 여유시간을 배려한다. 호주처럼 인구가 많은 나라들은 시스템으로 나라를 관리해야 하기 때문에 그런 배려가 원칙적으로 불가능하다. 뉴질랜드는 사회 곳곳에서 훈훈함을 느낄 수 있는 나라다. 뉴질랜드가 호주보다 상대적으로 작고 먹고 살기 어렵다고 하지만, 그런 불만은 호주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거기서는 호주가 너무 작은 나라라고 생각한다.
Q. 오랜 이민 생활과정에서 인종 차별로 인해 억울함을 느끼신 적이 있다면? 특히, 호주의 백호주의는 많은 이민 준비자들이 우려하는 부분이기도 한데...
실제 호주에서 살 때는 몰랐는데, 뉴질랜드에 와 보니 호주가 인종차별이 있다는 걸 느낀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우리나라 사람들이 인종 차별에 대해 말할 입장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한국 사람들만큼 인종 차별이 심한 민족도 찾아보기 어렵다.
어느 나라 교민사회나 말도 많고 탈도 많은 건 비슷하지만, 특히 뉴질랜드 교민사회 내에 서로를 믿지 못하는 불신풍조가 만연해 있는 것 같다. 이민 선배로서 이 부분에 대한 생각은?
노력하지 않고 얻으려는 마음, 댓가를 지불 하는 대신 남에게 의지하려는 마음이 모든 억울한 사건의 발단이 된다고 생각한다. 어떤 일이든 결정은 본인이 하기에 책임은 모두 본인에게 돌아가는 것이며, 남을 탓 할수 없다고 본다. 자신이 노력한 것 이상을 기대하거나 욕심을 부리지 않는다면 이런 불신풍조가 문제가 될 만큼 크지는 않을 것이다.
Q. 현재 정신병 환자들을 돌보는 사회복지사로 근무하신다고 들었다. 호주와 뉴질랜드에서 계속 사업에 전념하시던 분이 갑작스럽게 인생의 방향을 전환하게 된 동기가 있는지?
대학에서 경제학을 전공하고 계속 사업을 해 왔었다. 호주에서는 전자부품 수입업체를 15년 가까이 운영하기도 했고, 2001년 뉴질랜드로 건너온 후 작년까지 유학과 이민업무를 해 왔다. 유학원 운영당시 만난 한 사람과의 인연이 내 인생의 방향을 바꾸는 계기가 됐다. 재정관리 업체를 운영하던 그는, 꽤 규모있는 회사의 사장임에도 불구하고 사는 모습이 매우 검소했다. 우연히 방문한 그의 집이 너무 누추하고 허름해서 충격적일 정도였다. 더 놀라운 건 그가 상당히 많은 돈을 자신의 집을 고치거나 멋진 차를 사기 위해 쓰는 대신, 사회기관에 기부해오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교회를 다니면서 사회활동을 왕성하게 하는 뉴질랜드의 노인들을 봐 오긴 했지만, 그의 사는 모습은 특별한 감동을 주었고 내 삶을 돌아보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현재 근무하는 The Equip은 그 사람의 소개로 인터뷰 기회를 얻었다. 인터뷰에서 '보수를 받기보다는 그 동안 받아 온 혜택을 사회에 보답하기 위해 이러한 기관서 일하길 원한다'고 해서인지 2차 면접 시 키위 두 명을 제치고 일 할 기회를 얻게 됐다.
Q. Mental Health Social Worker 라는 직업에 대해 좀 더 구체적인 소개를 해 달라.
뉴질랜드에는 정신병 환자들을 치료하는 병원이 있고, 치료 후 요양단계에 있는 사람들을 위한 병동 기관이 있었다. 하지만, 전문가들 사이에 '환자들을 가두어 관리하는 것 보다 가족으로 돌아가게 하는 것이 더 좋다.'라는 의견이 우세해 결국 정신병 환자 요양기관(병동)은 폐쇄됐다. 현재, 치료를 받은 환자들은 가정으로 돌아가 전문인력의 방문 관리를 받거나, 상태가 심한 경우 정부가 지원하는 플랫에 입소하게 된다. 대형 기관이 폐쇄되면서 정신병환자 관리인력이 매우 부족한 실정이다. 사회복지업무에 해당하는 만큼 보수도 적고 정신병 환자들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이 이 일을 기피하는 주된 이유다. 사명감이 없으면 하기 힘든 일인 게 사실이기도 하다. 본인은 현재 24시간 운영되는 플랫에서 근무한다. 3교대 근무로 운영되고 주말에도 일하는 대신 4일 일하고 2일 쉰다.
Q. 앞으로의 계획은?
현재 카운셀링 전문가 코스를 밟고 있다. 내년에도 Scholarship이 허용되면 알콜&약물 카운셀링 코스를 할 계획이다. 그 후엔.. 아내와 함께 영국에 정착하면서 유럽 전쟁사를 읽으며 프랑스, 독일 등 유럽 답사 여행을 1년 정도 하고 싶다. 일 년에 한 번 휴가가 나면 호주에 있는 자녀들을 방문하느라 우리 부부끼리 여행할 시간이 없었던 게 아쉽다. 나중에 눈을 감을 때를 회상하며 미소지을 수 있는 좋은 추억을 많이 만들고 싶다.
글: 이연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