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호사 임용을 앞두고 있는 교민 있다. 안정적인 공무원으로 뉴질랜드 사회를 처음 시작 했던 그는 뉴질랜드 이민성 이민관으로 6년 동안 근무했다. 하지만 무엇인가 비어있는 자신의 모습으로 보고 돌연 사표를 제출 하고 오클랜드 법대에 입학 했다. 도전 인생 스토리, 이민관에서 변호사로 새로운 삶을 개척 해가는 김용석 씨를 만나 보았다.
뉴질랜드는 장인어른 소개로 처음 알게 되어 2001년 5월에 이민을 왔다.결혼 2개월만에 내린 속전속결의 결정이었다. 그때 당시만 해도 일반 이민분야 (General Skill Category)가 있어서 지금 보다 영주권 취득하기가 훨씬 용이했다. 물론 잡오퍼도 필요 없었다. 아마 지금 처럼 기술 이민 분야였으면 아마 훨씬 어려웠을 것이다.
더니든 도착 다음날 시내 산책을 나갔던 기억이 아직 생생하다. 너무나 한산한 길거리와 서늘한 가을날씨를 느끼면서, 과연 내가 이 나라에 뿌리를 내릴 수 있을까라는 근심 속에서 와이프에게 들키지 않으려고 애썼던 기억이 생생하다.
랭귀지 과정 6개월을 거쳐 오타고 대학MBA과정을 다니게 되었다. 그 와중에 첫째 아이가 태어났다. 그 당시만 해도 더니든에는 교민의 수가 손에 꼽을 정도로 적어 정말 모든 것이 낯설고 멀게만 느껴졌다. 하나부터 열까지 새로운 것이었고 직접 몸으로 부딛쳐 알아가야 하는 상황이었다. 오랫동안 나의 여자친구였던 아내를 데리고 낯선 곳 이국땅으로 건어와서 무턱대고 아이를 낳고…지금 생각하면 다시 맘이 아련해 진다.
이민성 이민관으로 뉴질랜드 사회 시작
MBA과정 논문을 준비하던 중 신문광고를 보고 입사지원을 하고, 3개월의 긴 채용과정을 거쳐2003년 12월에 입사하게 되었다. 부서는 Auckland Central Branch(ACB) 였다. 나와 함께 입사한 동기는 총 4명이었다. 현재 나만 빼고 그 분들은 아직 이민성에서 열심히 근무 중이다. 이민성이 노동부 소속이라 처음 첫 주는 노동부산하 입문교육을, 그리로 나머지 3주는 이민성 입문교육을 받았다. 교육 수료 후 시험을 쳐서 합격을 해야만 Immigration officer warrant를 정식으로 발급 받을 수가 있었다.무사히 Warrant시험을 마치고 처음 맡은 업무는 가족초정 및 심사가 완료되지 않은 일반이민 영주권을 심사하는 일이었다. 업무 시작 첫날부터 무지 바빴던 기억이 난다. 10분 간격으로 전화가 울려대고 신청자들로부터 날라온 각종 우편물들이 산더미처럼 쌓여갔다. 지금처럼 따로 Documentation 부서가 따로 있지 않아 일일이 우편물을 개봉해서 내용을 이민성 전산 AMS에 남겨야 했다.
그렇게 일하던 중 새로운 기술이민규정 (Skilled Migrant Category)가 발표되고 이민성에서는 업무를 담당할 Customised Service Officer들과 verification officer들을 대대적으로 채용하게 되어 지원하게 되었고 다행히 두 곳이 다 합격이 되었지만 직급이 조금 더 높고 급여가 조금 더 좋았던 verification officer 직책을 맡게 되었다. 전근이 되어 간 부서의 이름은 Central Verification Branch (CVU)이었다. 비록 같은 건물에 있었지만 ACB 동료들로 부터 따뜻한 환송을 받고 2004년 9월부터 새로운 부서에서 활동하게 되었다. CVU의 주요업무는 기술이민 관련 고용관계 및 가족초청이민규정상의 가족관계를 실사하는 업무였다. 직접 고용주 및 신청자들을 방문하여 인터뷰하는 일이라 외근이 잦은 일이었고 또한 조심해야 할 일도 많았다. 일례로 컴퓨터부품 소매업체를 실사한 일이 있는데, 마케팅매니저로 제출된 잡오퍼와는 달리 물류담당 직원이었던 사실을 보고한 것에 불만을 품고 물건을 훔쳤다고 이민성에 허위신고를 하여 내부조사까지 받게 되는 웃지 못할 헤프닝도 있었다.
CVU에서 약 4년을 근무하면서 한인업체도 상당수 방문하였는데, 늘 안타까왔던 일들은 한인 고용주들께서 이민규정에서 요구하는 사항들을 제대로 숙지하고 있지 않아 영주권 신청자들에게 본의 아니게 피해를 주는 사례를 목격하는 것이었다. 예를 들면ANZSCO가 요구하는 직무내용들을 정확히 숙지하지 않고서 Chef 가 Cook가 되어버리거나 Accountant가 bookkeeper로 설명 되어지는 사례들이었다.
가장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는 이민성 주관으로 한인 소유의 한 이민대행업체를 현지 경찰과 합동으로 압수수색을 실시한 사례이다. 한국교민이 운영하던 이민대행업체 였는데 많은 한국 교민들로부터 고액의 이민 대행료를 받고 허위 잡오퍼를 제공하여 이민성에 적발된 사례였다.압수수색을 통해 수집된 정보를 보고는 정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영주권 취득을 위해 많게는 수십 만불의 비용을 지불하고도 결국 영주권은 받지도 못하고 한국으로 돌아가게 된 교민들이 한 두사람이 아니었다.
이민성에서의 근무기간이 늘면서 힘들었던 점은 영주권 심사 및 실사를 담당하는 입장에서 누군가에게 도움을 주는 입장보다는 이민 규정에 맞지 않는 부분들을 찾아내어야 하는 업무 특성상 열심히 일 하고도 큰 보람을 느낄 수 없다는 부분이었다. 나는 한국교민 전담할 목적으로 이민성에 채용된 것이 아니고 업무고과 또한 동일하게 다른 이민관들과 공통 평가되던 입장이었다. 결과적으로 내가 한국에 관련된 정보를 다른 동료직원들에 대해 더 많이 알고 있어서 오히려 나에게 할당된 한국교민들이 그렇지 않은 분들에 비해서 오히려 더 손해를 보지 않았나 하는 근심도 많았다.
이민성에서 한평생을 근무해 왔던 동료들을 보면서 수십년 후의 내 모습도 그들과 같이 도전 없이 안주하는 삶을 산 똑같은 모습일 것이라는 걱정이었다. 사실 이민을 선택한 많은 교민들도 어떤 도전의식이 없었다면 과감히 이민을 결정할 수 없었겠죠! 아직 젊은 나이이고, 나에게 주어진 도전들이 아직도 많이 남아 있다고 결정했고 그래서 법대에 진학하게 되었다. 이런 결정이 있기 까지는 아내의 전폭적인 지지가 절대적이었다. 또한 뉴질랜드에서 우연히 찾은 고등학교 동기 친구 녀석들도 많은 영향을 주었다. 마찬가지로, 안정된 직장을 던지고 도전을 택해 성공한 모습을 먼저 보여 준 친구들이 있었기에 지금의 내 모습이 가능했다고 믿는다.
앞서 언급한 것과 같이 쉬운 방법은 없다는 것을 말씀 드리고 싶다. 이민과 관련해서는 본인이 생각해서 가장 어려운 길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가장 최선의 길인 경우가 많다. 영어능력, 또는 학력 및 경력이 부족한 경우, 이를 우회하는 방법을 찾는 것 보다 정면으로 부딪쳐 부족한 부분을 채워나가는 것이 시간상 늦어질 수도 있지만 대부분의 경우 최선의 경우임을 알고 도전해 나가는 마음을 가지고 준비해 나가면 좋겠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다.
또한 한 두번의 도전이 실패였다고 하더라도 쉽게 포기하기 보다는 전문가의 조언을 일단 구하시는 것도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현재 근무 하고 있는 Equity law 회사
지금 내가 근무하고 있는 EQUITY LAW는 대표변호사인 Evgeny Orlov를 추축으로 4명의 barrister가 근무하고 있는 Chambers이다. 주요 업무는 이민 및 민형사 송무업무를 하고 있다. 대표 변호사는 시드니 법대를 졸업한 후 뉴질랜드 뿐만 아니라 러시아 및 영국에서 민사 및 인권관련 소송전문 변호사로 근무하였다. 최근 뉴질랜드 대법원 (Supreme Court) 에서 영국인 출신 불법체류자의 이민항소 소송을 승소한 예 외에 많은 송무경험을 보유한 유능한 변호사 이다. 현재 내가 하고 있는 주요업무는 대표변호사의 지도하에 영주권및 단기비자 기각건 및 불법체류자 구제업무를 맞고 있고, 한국고객의 비율은 약 30%정도 되는 것 같다.
도전은 새로운 세상으로의 시작
마지막으로 뉴질랜드에서 공부 하고 있는 교민 후배들에게
4여년간의 오클랜드 법대 공부를 같이 한 젊은 친구들에게서 느낀 것은 삶에 대해 매우 진지하고 노력하는 모습을 가지고 생활한다는 것이었다. 나에 모습을 통해 그들이 느꼈으면 하는 것은 앞으로 펼쳐질 인생에는 많은 도전들이 다가올 것이고 그런 도전들을 피하기 보다는 정면으로 부딛치고 즐길 수 있는 여유를 가지고 삶에 임한다면, 어느덧 보다 더 높은 곳에 서있는 스스로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라는 조언을 주고 싶다.
변호사로서의 나의 목표는 이민관련 행정소원 및 민형사전문 소송변호사로서 많은 분들에게 도움을 드리고 싶다. 또한 그 동안 나 때문에 고생한 사랑스런 세 아이 그리고 아내와 함께 좀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싶다.
글,사진 : 김수동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