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개
5,631
26/07/2008. 15:20 KoreaTimes (125.♡.179.126)
불과 15여년전만 해도 뉴질랜드의 한국 교민은 삼사백 명이었다. 한국 사람도 만나기 어렵고 한국 물건도 살 수 없었던 그 때로부터 강산이 채 두 번 바뀌기도 전에 한국 교민이 수만 명에 이르게 되었으니 격세지감을 느낀다.
16년 전인 1990년 부모님을 따라 이민 온 후 현재 ASB 은행의 투자부서를 담당 하고 있는 임상혁 씨로부터 라면이 생기면 파티를 했다는 그 때 그 시절(?)의 이야기를 들어 보았다.
임상혁 씨 가족은 출장과 여행으로 뉴질랜드에 방문한 후 깊은 인상을 받으셨던 아버지의 제안으로 뉴질랜드에 발을 디뎠다. 노스쇼어의 Murrays Bay Intermediate에 처음 입학했을 때는 전교에서 한국인은 물론 동양인이 극소수였다. "키위 애들이 동양 사람인 저를 외계인 보듯 신기해 하면서 얼마나 관심을 갖는지 학교에 가면 심지어 화장실에까지 제 뒤로 아이들이 죽 붙어 따라다녔어요. 교실에 앉아 있으면 옆으로 와서 제 검은 머리카락을 뽑아 가는 아이들도 많았답니다."
비록 이런 수모를 잠깐 당했지만 임씨는 한 편으로는 수퍼 스타였다. 아이들이 모이면 무엇을 하고 놀 것인지 항상 임씨의 최종 결제(?)를 받았다. 또 한국과 수학 실력 차이가 많이 나서 수학 선생님은 수업 시간에 영어책을 주고 영어 공부를 시켰는데 구구단을 안 외우는 키위 아이들이 한 번은 전자 계산기를 가져와 임씨와 곱셈 빨 리 풀기를 했다.
구구단만 외우면 답이 곧바로 나오니 임씨가 계산기보다 당연히 빨랐다. 이긴 임 씨에게 아이 들이 외쳤다.
"You are a genius!(넌 천재야!)"
한국 음식을 찾기 힘들어 김치는 양배추김치로 대신 했었고 아버지가 사업차 한국에 다녀오실 때가 한국 과자와 라면을 먹는 거의 유일한 때였다. 그는 라면 한 박스를 놓고 한 달에 한 개씩 먹기도 했다며 웃는다.
학교생활은 정말 재미있었다. 공부에 대한 부담도 적고 방과 후 학원 순례를 하던 한국에서의 생활과는 대조적이었다. 주말에도 친구들로 집이 항상 북적거렸다. 시간이 지나면서 영어도 늘고 3년 정도 지나자 영어에 대한 어려움을 완전히 해결할 수 있었다.
하지만 언어의 벽은 넘었어도 동양인이라는 보이지 않는 편견의 담은 언제나 있어 왔다. 그럴 때마다 임 씨는 직접 맞부딪치기보다 원만한 그의 성격대로 너그러이 받아 들여 주려고 노력했고 그들의 관심사에 같이 흥미를 가져 주었다. 임 씨의 그런 모습에 오히려 나중에는 미안하다면서 그들이 먼저 다가왔다.
임상혁씨는 ASB의 한국인 지점에서 1년간 일하다가 투자 부서로 옮긴 지 이제 3년 반이 되었다.
"대학에서 금융, 경제를 전공하고 졸업 후에 1년 동안 서울대학교에서 공부했습니다. 한국 학생들 참 똑똑하더라고요. 그 때를 계기로 한국어도 많이 늘게 되었고 또 투자 동아리 활동도 많은 도전이 됐습니다. 무엇보다 그 때가 제 진로를 더욱 확실히 할 수 있었던 결정적인 시기가 됐던 것 같습니다."
취직도 쉽지 않은 일이었지만 자신의 적성 분야를 찾아 꾸준히 전문지식을 축적해왔던 임씨는 자신감을 가지고 적극적으로 취업의 문을 두드렸다. 이력서를 넣었지만 인터뷰 연락이 오지 않자 직접 찾아가 자신의 가능성과 일에 대한 열정을 보여 주었다.
"지금은 내가 베스트 가 아니지만 머지않아 그럴 것이다"는 그의 배짱은 매니저의 마음문을 열게 했다.
투자부서로 옮긴 이후에는 물 만난 고기처럼 그 동안 쌓아 왔던 실력을 맘껏 발휘해서 자율적으로 제안서를 만들어 제출하기도 했다. 그러자 회사측에서도 'Senior Analyst'라는 새로운 직책을 마련, 투자부서 경영을 맡길 만큼 그의 노력과 능력을 인정해 주었다.
그는 소위 줄을 잘 서야 하고, 출신배경이 중요한 역할을 하는 일부 한국 사회와 달리 아시안이라 하더라도 노력하는만큼 인정해 주고, 정직과 성실이 통하는 것이 키위 사회의 장점이라고 했다. 준비와 열정을 자신감으로 잘 포장해 보여 주는 것이 열쇠라고 덧붙였다.
임상혁씨는 마지막으로 이민 1세대인 부모님의 희생으로 지금의 자신이 있다는 것을 깊이 감사한다면서 우리 1.5세대, 2세대 자녀들이 이 은혜를 잊지 말고 뉴질랜드의 자랑스런 주역으로 자리잡아 주길 소망한다며 말을 맺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