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질랜드 교사생활을 끝으로 은퇴를 준비하고 있는 한인 교사가 있다. 이민 30년, 뉴질랜드 교사 25년을 이어 오면서 기쁜 일과 슬픈 일도 있었지만 학생들과 함께 밝게 생활한 뉴질랜드 생활을 다시 한번 돌아본다. 학생들에게 받은 만큼 돌려준다는 다짐을 늘 했는데, 역시 돌아보면 학생들에게 빚진 게 훨씬 더 많다. 무엇보다 지난 25년 시간을 함께 했던 다양한 국적의 모든 학생들에게 정말 고맙게 생각한다. 은퇴 후에는 학생들과 함께 읽고 토론했던 모든 추억들이 사무치게 그리울 듯하다. 5월이면 뉴질랜드 교육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가는 학교(AIC)의 마지막을 지키고 있는 김형근(Auckland International College) 교사를 만나 보았다.
뉴질랜드 이민 30년 중에서 15년을 근무하면서 평생직장이라고 생각했던 학교(AIC)가 이제 문을 닫는다. 지난 2021년 10월 28일 목요일이었다. 교장선생님으로부터 ‘내일 금요일에 줌 미팅이 있으니까 모두 참석’하라는 메일을 받았을 때, 선생님들 누구도 학교가 문을 닫는다고는 전혀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다음날 미팅에서 학교가 ‘2023년 5월 시험(IB final)을 마지막으로 문을 닫는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도 사실 크게 실감이 나지 않았다. 당시는 코로나로 록다운(lockdown)이 계속 이어지고 있었던 상황이었고, 교직원들 모두 2년 뒤의 먼 일이니까, 국경이 다시 개방되고 한국이나 중국으로부터의 유학생들이 늘어나면 또 상황이 바뀔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2022년 새학기가 되어 일부 선생님들이 학교를 떠나고, 다른 교사들도 새로운 직장으로 떠나면서 차츰 실감이 되기 시작했는지 남은 교사들도 앞으로의 계획을 걱정스럽게 물어보기 시작했다. 요즘은 10명 남짓한 교사들이 마지막 13학년 학기말고사를 마무리하고 있다 보니 평일인데도 학교가 무척 조용하다. 오늘은 30명 남짓한 학생들이 강당에서 시험을 치르고 있다. 시험기간이라 조용한 교정에 날카로운 매미 울음소리만 들리고, 청명한 초가을 새파란 잔디가 웃자란 운동장에는 왜가리 3마리와 가면물떼세 2마리만 먹이를 찾아 햇볕 아래 텅빈 축구 골대 주변에서 게으르게 움직이고 있다. 오늘따라 시원한 바람이 아쉬운 마음을 위로하듯 코끝을 상쾌하게 스쳐온다.
AIC 명문고 순위 1위, 역사 속으로 사라지는 학교
AIC(Auckland International College)는 매년 수십 명씩 전세계 유명 대학 합격생을 배출하면서, 자타가 인정하는 ‘명문대 진학을 위한 디딤돌’로 자리매김해왔다. 2015년에는 서울대학교에 4명의 학생이 합격해서 뉴질랜드에서 전무후무한 성과를 올려 코리아 포스트에 보도되기도 했고, 2020년에는 매년 학업 성취도로 학교를 평가하는 ‘뉴질랜드 크림슨 랭킹’에서 명문고등학교 순위 1위에 올라 뉴질랜드 헤럴드에 크게 기사화되었다. 그러나, 이제 5월 말이면 AIC는 그 영광스러운 자취만 남기고 뉴질랜드 교육사회의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된다.
뉴질랜드 교사생활, 힘들었지만 보람으로
지난 1997년 교사과정(Massey University College of Education, Palmerston North )을 이수하고 풀타임 교사로 1998년 2월 첫 교직을 얻게 된 학교(Pakuranga College)에서는 주로 NCEA 일본어 과목을 영어로 가르치면서 한국어와 ESOL영어과정을 한 반씩 가르쳤다. 일본어와 일본문화를, 그것도 어눌한 영어로 가르친다는 게 쉽지 않았지만, 그보다도 매번 우스꽝스러운 영어발음을 흉내 내는 30명 가까운 개구쟁이 9학년 한국어반이 가장 힘겨웠다. 하루하루를 버틴다는 생각으로 어느덧10년 가까운 시간을 보내면서 몸과 마음이 많이 지쳐갔다.
그즈음 다시없을 기회가 찾아왔다. AIC에서 한국문학 교사를 모집한다는 공고였다. 하지만 당시에는 학교(Pakuranga College)에 적을 두면서 파트타임으로 시작한 상담심리 대학원 과정이 3년을 넘어 석사논문도 통과되고 실습과정만 남은 상황에서 판단이 쉽지 않았지만 새로운 학교에서의 생활을 시작했다. 그리고 내가 어떤 교사가 되어야 할지를 생각해보았다. 학생들에게 도움을 주지는 못할망정 “내가 학생들의 아픈 기억으로 남지는 말자. 그리고 말이나 행동으로 학생들은 존중하는 마음을 갖고 언행을 늘 조심하자”며 이 두 가지만 다짐을 했다.
지난 AIC 학교에서의15년을 돌아보면, 내가 평가한 점수에 만족하지 못하거나 나의 섣부른 조언에 상처를 받아 불만을 표시하는 학생들도 있었다. 지금도 자주 학생들과 내가 준 성적을 두고 갑론을박을 하기도 한다. 내 수업이나 조언이 이해가 되지 않을 때도 학생들은 종종 의문을 제기한다. 하나하나 지적하면서 설명을 하면 학생들도 지지 않고 또박또박 반박을 하기 시작한다. 특히 다른 학생들이 모두 지켜보는 수업시간이면 이 지점에서부터 본인도 감정이 흔들리기 시작하면서 언성이 높아진다. 서로의 자존심을 걸고 학생과 교사가 격앙되어 논쟁을 이어간다.
한국문학은 모두 전문가가 되어 자기의 의견을 이야기할 수 있는 모국어 과목이기 때문에 이런 치열한 지적토론이 가능한 것이다. 선생으로서의 오기와 자존심이 다칠세라 더욱 강하게 다그치면, 이제 학생들이 조금씩 물러나 주는 게 보인다. 나이 든 선생을 배려해서 그 정도에서 멈춰주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학생들과 함께 공부했던 100여편이 넘는 문학작품과 텍스트 각 페이지마다 이런 크고 작은 추억들이 남아있다. 다시없을 이런 소중한 경험들을 앞으로 살아갈 내 삶 속에서 두고두고 그리워하게 될 듯하다.
전국 뉴질랜드 교사들, 많은 응원 보내
학교 현장에서 묵묵히 일하는 교사들에 대한 응원이 정말 필요하다. 교사들은 3년마다 자격증을 갱신한다. 지금은 좀 간소화되었지만 예전에는 각 항목마다 수업평가나 수업계획표, 연수기록 등 증빙서류를 매년 제출하기도 했다. 겉으로 보기에는 멋진 전문직이지만 사실 육체노동과 정신노동, 그리고 감성노동이 합쳐진 고된 직업이다. 가르치는 보람이라는 반대급부를 빼고 월급이나 근무환경으로만 보면 개선되어야 할 점이 많다.
한인 학생들에게 한마디
학생들에게는 꼭 자기가 주인이 되는 삶, 자기 ‘결’대로 사는 삶을 추구하라고 권하고 싶다. 그러려면 자신이 누구인지,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잘 할 수 있는지를 발견하는 작업이 함께 이루어져야 한다. 개성이 경쟁력이 되는 미래의 메타버스 세상은 분명 지금과는 사뭇 다를 것이다. 우리 한인 학생들에게 많은 응원을 보낸다.
김수동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