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길동이 간다(6)
여행 전날 종일토록 맑았던 날씨가 오후부터 갑작스럽게 찾아온 비바람과 폭풍으로 말미암아 여행 일정을 변경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근심 어린 마음으로 거의 뜬 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아마도 우리 일행의 대부분도 나와 같은 생각이었을 것이다. 이른 아침 비에 젖은 도로에 무작정 올라탄 우리에게 동쪽 하늘에 어슴푸레 피어오르는 붉은 기운은 간밤의 근심을 모두 지워주기에 충분했고 이내 설렘으로 바뀌었다.
출발이다! 북섬 웨스트 코스트 카우리 나무 숲을 향하여. 명명하건대 ‘그 숨겨진 보물을 찾아서…’ 여행을 계획하면서 몇몇 사람들에게 자문을 구했지만, 그들 역시 가본 적은 없었고 단지 입소문으로만 터득하였다고 하였다. 어떤 이는 지나치는 길에 차창으로 잠시 스쳤던 기억을 간직하고 있기도 하였다. 짜인 일정과 특별한 정보도 없이 우리는 마치 지도 한 장에 모든 것을 맡긴 일종의 탐험가들 일는지도 모르겠다. 우리의 그러한 탐험의 서막을 알리려는 듯 동녘으로 멋진 일출이 보였다.
모든 차창을 열고 세상의 그 어느 진수성찬과도 바꿀 수 없는 맛좋은 공기를 폐부로 가득 흡입하면서 산골짜기를 지나고 작은 개울 등을 지나쳐서 워크워스와 월스포드를 지나쳐서 도달한 브린더원 푯말에서 좌회전하여 다가빌로 접어들었다. 약 1시간이 흘렀을까, 시계는 9시를 가리킬 즈음에 우리는 마타코헤에 위치한 카우리 나무 박물관에 도착하였다. 깔끔하게 정돈된 입구는 첫 손님을 맞이하려는 여러 스태프들의 움직임으로 분주하였다.
체크인하고 입장하면서부터 우리 일행을 포함한 여러 관광객의 입에서는 저절로 탄성이 쏟아져 나왔다. 이런 산간 오지에 엄청난 규모의 박물관이 있다는 것이 사실 믿기 힘들었다. 뉴질랜드의 무슨 무슨 박물관 하면 실상은 우리나라의 소규모의 창고와 엇비슷한 크기인 것이 사실인데 이곳은 여러 면에서 많이 달랐다.
이름에서부터 어쩐지 육중한 무게감이 느껴지는 카우리 나무의 웅장함과 카우리 나무의 특유한 견고함으로 인하여 이 나무의 벌목은 초기 개척민 시대와 시간상으로 동일 선상에 있다고 한다. 당시 생활 도구, 갖가지 기계와 작업 연장들이 생생하게 진열되어서 마치 잠시 휴식으로 벌목공들이 자리를 비운 듯 생각되었다. 카우리 검(Gum)은 숲 속의 보석처럼 빛이 났다. 옅은 황색을 띤 우리의 전통 한복에 장식하는 호박과 유사한 빛깔이었다. 그 고가의 가격으로 판매되는 카우리 검은 이렇게 가까이에서 마주하기도 쉽지 않은 일이었다.
반나절 이상은 시간을 할애하여야 족히 관람할 수 있는 곳이었지만 우리는 다음 일정을 위하여 문을 걸어 나왔다. 떠나는 버스에 우리를 친절히 안내하여 주었던 현지 가이드가 올라타서 감사와 작별의 인사를 나누었다. 뉴질랜드의 전형적인 목장 지대와 강가의 갈대숲 길을 서너 번 번갈아 지나치면서 약 1시간을 이동하였다. 학창시절 음악 시간에 익히 들었던 베토벤 교향곡 6번 전원 내지는 비발디의 4계 중 가을 등의 제목이 머릿속에 불현듯 떠올랐으나 멜로디는 전혀 기억이 없다. 가수 김상희의 ‘코스모스 피어있는 길’은 아는데…
한가한 가을 햇살이 눈을 간지럽힐 즈음에 다가빌 근처에서 발견한 쿠마라의 무인 판매소가 보였다. 이 근방이 바로 그 쿠마라(고구마)의 주산지. 돌아가는 길에 몇 봉지를 구입하여야겠다고 생각하였다. 황금색 들판을 지나서 산길에 접어들자 와이푸 포레스트라는 푯말에 이어서 늠름한 카우리 나무들이 군데군데 자리를 하고 있었다. 동류의 나무라고 하더라도 나무의 경도와 크기 등은 매우 제각각이었다. 우기에 접어든 숲 속의 나무 향, 피톤치드는 점점 그 짙음을 더하고 그 향기에 우리는 하나 둘씩 카우리 나무 숲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카우리 나무 숲
500살, 1,000살 그리고 1,200살 먹은 나무들에서 받은 감흥은 2,000살 이상을 맞이하였다고 하는 타네마푸타 카우리 나무 앞에 섰을 때는 마치 예수님과 같은 성인을 만난 것처럼 숙연함 혹은 경건한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그들이 과연 어떠한 시각으로 우리 인간들의 삶을 바라볼까. 어쩌면 짧은 세월 매일매일 아웅다웅하는 우리들을 ‘어여삐’ 여길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물아일체! 자연과 내가 하나가 될 수 있는 장소를 하나만 꼽으라면 바로 이곳이 아닐까 생각하였다.
발밑으로는 국립공원의 산세가 전개되고 영화 쥬만지의 한 장면과도 같이 당장에라도 쥐라기 시대에 서식하였던 공룡 시조새 등 파충류들이 눈앞으로 튀어나올 듯하였다. 뉴질랜드만이 가지고 있고 또한 뉴질랜드에서만 느낄 수 있는 자연으로부터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하였다. 이곳 자연이 우리에게 주는 감동은 비단 이뿐 만은 아니었다.
숨겨진 보물
오포노니 해변 마을에 펼쳐진 샌드 듄(모래 언덕)은 식상한 표현처럼 들릴지도 모르겠으나 또 이만큼 정확한 표현도 없으리라. 한 폭의 그림, 헛기침하기에도 조심스러울 정도로 고요한 어촌 마을에는 바람마저도 피해 다니는 듯싶었다. 소수의 관광객과 소박한 옷차림의 마오리들. 그들의 외관은 조금은 무섭게도 느껴졌지만 하얀 이를 마음껏 드러내 놓고 반갑게 악수를 청하는 모습 속에서 오래전에 헤어졌던 친구와 상봉한 듯하였다.
또한, 이곳은 돌고래의 아픈 추억이 있는 곳이다. 1955년 6월 불현듯 나타난 오포라는 돌고래의 출현은 이 마을을 떠들썩하게했으며 관광명소로 만들었다. 한동안 어린이와 사람들의 사랑과 관심을 받았다. 그러나 사람들의 이기심과 욕심으로 돌고래 오포는 잘 따르던 어린이들과 사람들 곁을 떠나고 말았다. 길지 않았던 돌고래의 전설 같은 이야기를 이 마을 한구석에 있는 조그만 동상이 대신한다. (네이버 블로그 홍길동 투어, 돌고래 오포 검색)
그리고 이곳은 석양이 멋진 곳이다. 서해안 바닷가 샌드 듄과 한적한 시골 마을이 어우러져 석양의 노을 빛을 감상할 수 있는 곳이다. 하기야 석양의 노을은 한 번도 같은 모양, 같은 그림, 같은 색깔이 아닌 것은 누구나 다 아는 것이다. 그래서 석양의 노을은 하루를 수고한 사람들에게 주는 하늘의 선물이다. 나 또한 뉴질랜드 여러 곳을 가보았지만 이곳이 손가락안에 드는 명소로 꼽을 수 있다. 이곳은 경치뿐만이 아니라 나의 개인적인 추억도 함께 서려 있어 더더욱 손가락 안에 꼽을 수 있다.
뻐근한 다리의 근육을 풀 겸, 여러 사람이 드나들고 있던 조그마한 바의 문을 열고 들어섰다. 종업원보다도 먼저 우리를 맞이한 것은 올드 팝송, Engelbert Humperdinck의 Please release me. 독일풍의 흑맥주에 잠시 목을 적시고 나와서 샌드 듄으로 출발하는 보트에 뛰어올랐다. 남녀노소 각기 다른 크기의 모래 썰매를 움켜지고 언덕으로 올라서 그 썰매에 몸을 맡기면 아래로 아래로 힘차게 흘러가는 속도감이 너무 좋았다.
또한, 맨발로 모래밭을 걷는 기분이 달랐다. 마치 무인도 같았다. 불과 한 시간여 만에 모래투성이가 된 우리를 구조(?)하러 온 보트로 인하여 아쉬운 로빈슨 크루소의 체험은 막을 내렸다. 가볍게 몸을 씻고 버스에 올랐다. 차 안의 히터로 인한 온기로 젖은 옷은 조금씩 건조되었고 그와 동시에 우리들의 눈꺼풀은 차츰 그 무게를 더해갔다. 그리고 한참을 지났다.
차의 사이드 브레이크가 작동되는 소리에 눈을 떠 보니 우리는 어느덧 다가빌 휴게소에 와 있었다. 그 한 곁에 있는 쿠마라 농장 겸 판매소에서는 말 그대로 고구마다운 붉은 빛깔의 쿠마라가 7킬로그램에 10달러였다. 일반 마켓의 30%도 안된다는 어느 일행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우리들의 주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구매력에 놀란 농장 주인의 바쁜 손의 끝에는 가이드와 기사에게 무료로 건네주려는 한 봉지의 쿠마라가 들려 있었다
이른 아침 우리의 출발지가 도착지로 변경될 즈음에 따라서 설레었던 마음은 어느새 아쉬움으로 바뀌었다. 이제는 추억이 되어 버렸지만, 그날 웨스트 코스트의 여행에서 경험했던 뉴질랜드의 순결한 자연의 향기는 나의 온몸 구석구석에서 삶의 원동력으로 살아 숨 쉬고 있음이 확실할 것이다.
홍길동 투어 제공